[노트북 단상] 타인을 믿으시나요?
이현정 사회부 차장
온라인 커뮤니티에 서울역 칼부림 사건을 예고하고 남녀 50명을 아무나 죽이겠다고 협박글을 올린 30대 남성이 지난 26일 구속됐다. 같은 날 인천에서는 대낮 길거리에서 60대 모친을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 한 40대 아들이 구속됐고, 강원도 횡성에서는 마트 계산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남성이 갑자기 흉기를 꺼내 직원을 찔렀다. 미국처럼 개인 총기 소지가 되지 않는 나라라고 안심만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흉기 살인, 흉기 테러가 우리와 너무 가까이 있다.
부산에서도 대낮 법원 앞 대로에서 유튜버가 생방송 도중 다른 유튜버에 의해 흉기로 살해 당한 사건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는 한 명문대 의대생이 여자친구가 이별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여성을 흉기로 무참히 살해했다. 연초에는 유력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겠다며 부산에서 정치인을 살해하려 한 일도 있었다. 사법절차도 못 믿겠고, 투표도 못 믿겠고, 사회도 못 믿겠다는 듯 이들은 사적 복수, 응징에 나서고 있다. 관계와 시스템 속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을, 직접 단죄하며 분풀이를 하려 든다. 논쟁이든, 연애든, 정치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엮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사회다.
한국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은 국가로 꼽힌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이 발표한 ‘2023 번영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수준은 세계 167개국 중 107위로, 우리 앞 뒤로는 에티오피아와 카자흐스탄이 있다. 동아시아-태평양 국가 18개국 중에서도 15위에 그쳤다.
공적기관에 대한 불신은 특히 뿌리 깊다. 사법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167개국 중 155위, 군 132위, 정치인 114위, 정부가 111위에 그쳤다.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신뢰가 높은 사회는 더 발전된 거버넌스, 낮은 범죄율, 더 높은 번영의 혜택을 누린다”고 했건만, 한국의 신뢰 지표는 추락하는 출생률만큼이나 암울하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도 “낯선 이와의 관계가 곧 미래와의 관계”라고 했다. 신뢰가 바탕이 되면 쓸 데 없는 절차와 비용이 줄어들고, 편리성과 안정감이 높아진다는 걸 사회적 자본 수준 4위 국가 스웨덴에 살며 기자도 경험한 바 있다. 불신은 외로움과 고립을 부르고, 결혼과 출산, 관계 맺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영국 철학자 윌 버킹엄은 저서 〈타인이라는 가능성〉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이 공동체 바깥의 낯선 이들과 만찬을 즐겼던 화덕 터의 사례를 들며, 뼛속 깊이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환대를 제안한다. 저자 스스로도 사랑하는 파트너를 유방암으로 떠나보낸 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유방암 기금 모금자의 포옹에 감정이 압도되는 경험을 한 바 있다.
다행히 우리도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었을 시기 연대감과 타인에 대한 신뢰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됐다. 마스크를 쓰고 방역 수칙을 지키는 일은 나의 안녕뿐 아니라 너의 안녕을 위하는 일이었고 우리는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얽힌 실타래를 ‘신뢰’라는 실머리에서부터 풀어보자.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