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깬 수묵화, 미술팬들 사로잡았다!
박영환 ‘흰’전, 8일까지 맥화랑
기하학적 직선과 구·풍경 조화
20대 불구 대가적 필치 선보여
“저에게는 먹이 가장 ‘힙’하고 ‘팝’한 도구입니다. 먹으로 평생 새로운 걸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박영환 작가의 이 한마디를 들으며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작가의 수묵화에 홀리는지 알 수 있었다. 올해 2월 부산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뗀 20대 중반이지만, 박 작가의 작품은 이미 대가의 풍모가 물씬 풍긴다. 부산 맥화랑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흰’이 작가에겐 상업화랑 첫 전시이자 전업 작가로 데뷔 무대지만, 전시 첫날 작품 대부분이 팔릴 정도로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선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실제로 박 작가의 작품은 앞서 몇 번의 아트 페어에서 본 적이 있다. 백여 개가 넘는 갤러리, 수천 점의 그림들이 한곳에 모였지만, 유독 많은 사람이 작가의 작품 앞에서 서성거렸다. 지나가던 관객들의 발길을 붙잡은 건 오롯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먹그림을 그렸어요. 그 매력에 푹 빠졌죠. 하지만 당시에도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먹그림으로는 먹고 살기는 힘들다며 이 분야를 기피했어요. 내가 보여주자 싶은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대학에 진학해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비슷하게 보이는 전통 수묵화를 그리는 것이 싫었다. 한국화에 바탕을 두고 있어도, 나만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결국 1년을 휴학하고 미친 듯 그림에 몰두했다. 마침내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수묵화가 탄생했다.
통창의 현대적인 건물 안, 직선의 촘촘한 계단 아래 둥근 구체들이 있다. 창밖으로 숲이 펼쳐지고 눈이 내린다. 안쪽의 구체는 진한 검은색이고, 회색과 흰색의 구체는 밖의 숲 곳곳에 놓여 있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눈 내리는 밖을 바라보는 것 같다. 화면의 양 모서리를 막아 세운 건물 벽, 중앙에 펼쳐진 계단은 건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밖의 풍경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공간이자 연출된 자연이다. 종이를 뜯어내 눈을 표현했고 흔들리는 나무의 질감이 잘 살아나 회화가 아니라 영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 속 창은 현재와 과거의 경계 지점입니다. 창 안의 검정 구체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삶을 뜻하고 밖의 흰 구체는 삶의 마지막 지점인 죽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사라진 기억이기도 합니다. 회색은 잊혀가는 기억이나 경험이고요. 사람 내면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시간의 흐름과 삶을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수묵화에 수학 도형 같은 모양들이 등장하는 걸 두고 처음에는 말이 많았다. 주변 친구와 선생님 모두 반대했다. 수묵 풍경화를 무척 잘 그리던 작가의 변신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미술 시장에선 낯선 시도가 새로운 매력으로 통했다. 먹과 종이, 화법에 대한 치열한 공부가 바탕이 돼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미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학생임에도 대안공간의 공모 전시를 비롯해 여러 곳의 그룹전에 초대받았다. 아트 페어에서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고, 맥화랑 미술상에 선정되며 대형 갤러리 초대 개인전까지 이어졌다.
창밖 풍경 그림과 함께 눈 내리는 산에서 구체를 굴리며 올라가는 사람을 그린 시리즈도 박 작가의 대표작이다.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박 작가는 그림 작업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사람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느끼도록 퍼포먼스 공연을 함께 진행한다. 맥화랑 전시 첫날에도 현대 무용과 무대 연출, 그림이 결합된 퍼포먼스 공연을 선보였다. 이전에도 영상 작업과 DJ믹싱이 들어간 퍼포먼스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퍼포먼스 공연 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6월 8일까지 열린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