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피해 사각지대 메우자” 경찰·병원·기업 손잡았다
가족에 학대 당한 기초수급자
치료·간병비 등 지원 체계 없어
사하서·강동병원·CJ 등 협약
지역사회 약자 위한 지원 나서
올해 초 90세 A 씨는 함께 거주하는 손자로부터 수차례 폭행을 당했다. A 씨는 폭행으로 안면부가 골절되는 등 심각한 상해를 입어 응급 봉합수술이 필요했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치료비를 지불할 여력이 없었다. 수입이 없는 A 씨는 관련기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기초생활수급자로 의료급여 혜택을 받고 있어 치료·간병비 등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A 씨는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채 며칠간 속을 썩일 수밖에 없었다.
A 씨의 딱한 사정을 사하경찰서 피해자전담경찰관이 알게 됐다. 경찰이 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서부센터)와 긴급회의를 한 끝에, 서부센터에서 치료비와 간병비 전액을 병원에 지원하겠다고 하면서 A 씨는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아동·노인학대와 가정폭력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 가해자가 가족인 경우 피해자를 구제하는 지원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로 지적된다. 부산 경찰과 지역 사회가 피해자 지원 사각지대를 메우는 지원 체계 마련에 나서 이목이 쏠린다.
28일 보건복지부와 부산경찰청에 따르면 아동·노인학대와 가정폭력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 가해자는 가족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노인·아동학대 현황보고서’에는 아동학대 가해자의 82.7%가 부모, 노인학대 가해자의 62.8% 이상이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인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가족 간 범죄의 경우 피해자는 치료비 등 경제적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범죄피해자 보호법 제19조 1항에 따르면, 범죄행위 당시 구조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 부부, 직계혈족 등 친족관계가 성립하는 경우 구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수입이 전혀 없는 기초수급자라 해도 의료급여 수령을 이유로 치료비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획일적인 법 조항 탓에 정작 도움이 필요한 범죄 피해자가 지원체계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것이다.
부산 일선 경찰서와 지역 유관기관이 이를 해소하기 위한 지원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부산 사하경찰서는 부산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강동병원·CJ제일제당 부산공장과 사각지대 범죄피해자 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이날 밝혔다.
사하경찰서가 지원 대상자를 발굴해 추천하면 강동병원은 범죄 피해 치료비의 20%를 지원한다. CJ제일제당 부산공장은 올해부터 매년 햇반 200박스를 서부센터에 지정 기부하고, 서부센터는 이를 필요한 범죄 피해자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향후 지역 유관기관의 참여를 유도해 지원을 더욱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도 세웠다.
부산 일선 경찰서가 범죄 피해자 직접 지원에 나서는 움직임은 또 있다. 연제경찰서는 2020년부터 삼성여객(주)과 함께 범죄 피해자에게 지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다만 유관기관과 협력을 통해 범죄 피해자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사하경찰서의 시도는 한층 더 발전된 모델로 평가받는다. 향후 범죄 피해자를 돕기 위한 지원체계 마련이 타 지자체로 확산될지도 주목된다.
전문가들은 범죄 피해자 지원체계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의대 최종술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법률이 가진 엄격성으로만 피해자를 판단한다면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라면서 “가능한 한 모든 피해자들의 상황을 포괄할 수 있도록 법제를 개정하고, 지역사회 내 협력을 통해 제도의 빈틈을 메워가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