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촌 사람들은 고통을 먹고 자란다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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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심연 / 탁장한

빈곤 연구자의 쪽방촌 거주기
1년간 동고동락하며 쓴 기록
쪽방촌 해법을 다각도로 제시

<서울의 심연> 표지 <서울의 심연> 표지

쪽방촌 거주자들은 한여름에도 보일러를 튼다. 보일러를 틀지 않으면 방바닥이 꿉꿉해지고 습기를 먹이 삼아 곰팡이가 자라기 때문이다. 보일러가 작동하면 습기는 겨우 사라지지만 좁은 방은 열기로 가득 찬다. 쪽방촌 거주자는 “여름이면 쪽방은 사막이나 다름없다”고 볼멘소리를 내뱉는다. 쪽방촌 거주자들은 한겨울에도 선풍기를 튼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는 선풍기가 유일한 환기 방법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을 만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는 게, 손발이 꽁꽁 어는 추위에도 그들이 선풍기를 트는 이유다. 하지만 대다수의 쪽방촌 거주자는 보일러나 선풍기를 쉬이 선택하지 못한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가스요금과 전기요금 때문이다. 쾌적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도 ‘사치’로 느끼는 그들은, 혹독한 계절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서울의 심연>은 도시빈민과 쪽방촌을 연구하는 한 청년 연구자가 서울의 한 쪽방촌에서 1년간 거주하며 써 내려간 기록이다. 여름부터 다음 해 여름까지 쪽방촌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느낀 경험을 담아냈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에서 10년간 도시 빈곤 연구에 매진한 작가는 1년간 200여 명과 구술 인터뷰를 진행해 쪽방촌의 현실을 실감나게 짚었다.

저자가 연구자로 활동해서인지 이 책은 누구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지 않는다. 쪽방촌 주민들, ‘사랑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봉사 단체, 쪽방 상담소, 건물주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자칫 ‘신파’로 흘러갈 수 있는 쪽방촌 주민들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 그려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따뜻한 마음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자가 본 쪽방촌은 ‘빈곤 비즈니스’라는 하나의 경제 구조로 작동하고 있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의 주거급여 인상분만큼 월세를 올리는 건물주, 월세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 관리인을 자처하는 세입자, 행여나 월세가 오를까 서로의 낭비를 감시하는 주민들은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는 중이다. 건물주와 관리인은 교묘하게 을과 을의 갈등을 부추기는데, 쪽방의 열악한 주거 환경에 대한 분노는 주로 세입자끼리의 분쟁으로 표출된다.

책 속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저자가 ‘쪽방 상담소’의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이다. 당초 ‘쪽방 상담소’는 지자체가 쪽방 주민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한다는 취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쪽방 상담소의 운영은 지자체가 편법 주거 형태인 쪽방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거주자들을 열악한 환경 속에 적응시킨다는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를 ‘빈곤 거버넌스’로 지칭했다.

책 말미에 저자는 쪽방촌의 유지(구심력)와 쪽방촌의 탈피(원심력)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대안을 제시한다. ‘빈곤 비즈니스’는 수요와 공급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방향으로만 해법을 마련할 수 없다는 취지다. 쪽방 상담소, 사랑방, 건물주 등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세심히 고려한 점이 눈에 띈다.

서울을 중심으로 쓰인 이야기지만 쪽방촌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 만큼 부산에서도 충분히 귀 기울일만한 책이다. 동구 매축지 마을 등 쪽방촌 주민들은 해마다 폭염과 한파로 고통받지만 상황은 쉽사리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부산이 직면한 고령화와 저소득층 노인의 증가는 쪽방촌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쪽방촌 문제가 <서울의 심연>을 넘어 ‘부산의 심연’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바란다. 탁장한 지음/필요한책/296쪽/1만 8000원.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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