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맹이 괭이밥과 두 여인
문계성 수필가
꽃을 준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다
저세상으로 가고 없지만
맹이 괭이밥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 그때 집사람은 화단에 가득할 맹이 괭이밥꽃을 생각했을 것이다. 집사람은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현영이 엄마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지니고 있어야 할 물건을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딸 결혼식 때도 왔었고, 아들 결혼 때도 ‘일 때문에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많은 부조를 보냈는데…꼭 보고 싶은데.” 2년여에 걸친 항암치료에 지칠 대로 지친 집사람이, 병실 창밖을 내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집사람은, 언젠가 핸드폰을 정리할 때 실수하여 현영이 엄마의 전화번호가 지워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옛날 전화번호부 책을 찾아내어 뒤지고, 혹시나 해서 축의금 봉투를 뒤적거려도 현영이 엄마의 연락처는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연락처를 찾을 수 없다는 말에 집사람은 참으로 실망하는 것 같았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아니! 꼭 해야 할 말은 없고 그냥 보고 싶어서.” 현영이 엄마는,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이웃이었다. 현영이 엄마는 늘 웃는 조그마한 사람으로, 예식장에서 매니저 일을 하는 사람이라 했고, 그 딸이 우리 딸과 또래였다. 어느 날, 집사람이 클로버 같이 생긴 풀이 담긴 화분을 책상에 올리며 “현영이 엄마가 준 꽃!”이라 했다. 무슨 꽃인지는 집사람도 몰랐지만, 해마다 분홍색 작은 꽃을 피웠다.
현영이네와는, 우리가 이사하면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집사람과 현영이 엄마는 이사 후에도 자주 왕래가 있었는지, 이사한 지 20년이 넘은 시기에 치러진 우리 딸의 결혼식에, 현영이 엄마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참석했었다고 했다. 우리가 이사한 집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으므로, 집사람은 현영이 엄마가 준 꽃을 화단 가장자리에 옮겨 심었는데, 그때에야 그 꽃 이름이 맹이 괭이밥이라는 것을 알았다. 번식이 좋아 금방 화단을 덮었는데, 5월부터 한여름까지 분홍색으로 화단을 물들였다. 그 가운데 흰색 꽃도 더러 있어 고움을 더했다.
“아빠가 책 냈다고 책을 보냈더니, 축하한다며 만류를 해도 돈까지 보냈던데, 그 후에는 통 연락이 없네.” 집사람의 눈은 빈 하늘처럼 공허했다.
딸과 아들이 병실을 찾았을 때도, 집사람은 현영이 엄마와 연락할 길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때 나는, 집사람은 현영이 엄마에 대하여, 조용하면서도 끈질긴, 오래된 묵은장 같은 우정의 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궁금했다, 집사람이 투병 생활을 한 지가 3년이나 되어 가는데, 현영이 엄마는 그동안 왜 한 번도 연락이 없었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 현영이 엄마를 꼭 한 번 보았으면 하던 집사람은, 끝내 현영이 엄마와 연락이 닿지 못하고 임종을 맞았다. 임종 이틀 전까지 현영이 엄마를 찾던 집사람의 모습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정 보고 싶어 하는 인정(人情)의 절절함과, 그 절절함조차 혼자서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친구의 손을 잡고, 죽음을 앞둔 그 고적(孤寂)한 심정과, 사는 동안 늘 마음 써 주어 고마웠다고, 부디 잘 지내야 한다고, 그 마음의 말을 꼭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집사람이 간 후, 첫 번째 맞는 5월! 화단에는 맹이 괭이밥꽃이 가득 피었다. 꽃을 심은 사람은, 꽃을 준 사람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다 저세상으로 가고 없지만, 인정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맹이 괭이밥은, 질릴 만큼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기를 이토록 화려하게 춤추도록 해 준 사람이 있든, 없든, 두 여인의 인연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미풍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