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노태우 비자금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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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세간의 화제는 단연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간의 이혼 소송 항소심 결과였다. 1심 선고보다 무려 20배 이상 많은 1조 3800여억 원의 재산분할 액수와 위자료 20억 원은 ‘세기의 이혼 소송’으로 불리며 보통사람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역시 재벌의 이혼 소송은 급이 다르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재산분할에는 하나의 ‘비밀 코드’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유입이다. 1995년 당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노 전 대통령의 ‘4000억 원 비자금’ 보유설이 30년을 훌쩍 뛰어넘어 자녀의 이혼 소송을 계기로 다시 세상에 소환된 것이다. 노소영 관장은 1990년대 부친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그룹에 유입돼 증권사 인수 등에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6장의 사진과 ‘선경 300억’ 메모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재판부는 이 자금이 SK그룹의 경영 활동을 뒷받침한 ‘유형적 기여’의 증빙으로 받아들였다.

1995년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던 노 전 대통령의 거액 비자금이 30년을 돌고 돌아 자녀에게 엄청난 규모의 재산이 돼 돌아온 셈인데,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요즘 말로 엄청난 ‘아빠 찬스’의 결과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의 비자금은 어떻게 조성됐을까. 권력은 재벌을 비호하고 재벌은 권력의 사익을 챙겨주는 밀실의 합의로 오고 간 돈이 비자금이다. 비밀이 생명이지만 언젠가 꼭 들통나는 것도 비자금의 속성이다.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역시 거의 재벌에서 나왔다. 권력자와 재벌 간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산물이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뒤 그해 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이를 목격한 국민들은 큰 정신적인 충격을 겪어야 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우리 정치사의 오점인 권력자의 비자금으로 인한 부정한 재산이 오롯이 그 자녀의 몫으로 대물림되는 것을 국민들이 곱게 여길 리 없다. 당연히 ‘국가 몰수’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법률적으론 쉽지 않다고 하니 법적 판단이 더 궁금해진다. 다만 권력자와 재벌 간 정경유착의 산물이 아무런 규명도 없이 조 단위의 재산으로 이어지는 현실에 누구라도 심사가 편안할 리는 없을 것 같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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