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친밀함의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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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여성 사흘에 한 번 남편·애인에 살해돼
전 연령대에 걸쳐 발생 해마다 증가세
정부 공식 통계 없어 실태 파악도 한계

교제폭력에 대한 법과 제도조차 미비
‘죽어야 사는 여성의 인권’ 현실 확인
전문적이고 다각적인 대책 수립 시급

대한민국에서는 사흘에 한 번씩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된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2023년 분노의 게이지- 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 살해 분석’ 보고서 내용에 따르면 그렇다. 그것도 최소한의 숫자다. 202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38명의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보도되었다.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11명이며, 자녀 부모 친구 등 주변인 피해자 수를 포함하면 피해자는 매년 최소 568명에 이른다. 15시간마다 한 번씩 부부나 연인 사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 의해 강력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만 집계된 이유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정부의 공식 통계 구축을 촉구하기 위하여 2009년부터 ‘분노의 게이지’라는 이름으로 매년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 살해 분석’ 보고서를 발표해 왔다.

최근 언론이 심각한 교제폭력 사건을 연일 보도하고 있다. 20대 남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에서 헤어진 전 연인을 칼로 무참히 살해한 데 이어 거제, 청주, 대전에서 피해자의 목숨을 빼앗은 심각한 교제폭력 사건이 일어났다. 10대들의 교제폭력 피해는 2배로 증가했고, 20대에서 70대까지 희생자는 전 연령대에 걸쳐 있다. 여성가족부와 경찰청에 따르면 2023년 교제폭력 사건 검거 인원은 약 1만 4000명으로 2020년보다 55.7%나 늘어났다. 스토킹과 교제폭력이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경로가 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최근 부산에서도 교제폭력에 시달리던 20대 여성이 스토킹 피해 끝에 오피스텔에서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에서는 지난해 기준으로 하루 평균 약 12건씩 교제폭력 관련 신고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정부 공식 통계는 없기에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구체적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내년부터 경찰에서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 관련, 보다 고도화된 범죄 통계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에서 벌어지는 양상과 비슷한 측면을 교제폭력에서 발견한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진다는 점, 사람 사이에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는 경계를 쉽게 넘어가 버린다는 점, 폭력이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자행된다는 점, 무엇보다 살인과 같은 심각한 강력범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정폭력에 의한 살인 사건의 70%가 관계를 끝내고자 할 때 발생한 것과 마찬가지로 교제폭력 역시 ‘안전 이별’이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관계를 끝내는 과정에서 심각한 강력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명백한 물리적 폭력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법적 보호를 받기는 쉽지 않다. 피해자의 내밀한 사생활이 침해당하거나 연인 관계에서의 다툼이라는 이유로 경범죄로 다루어지거나 오히려 피해자가 쌍방 폭행으로 기소되는 것이 현실이다. 친밀한 관계의 특수성에서 오는 폭력의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전문적이고 다각적인 대처가 무엇보다 시급히 요구된다. 기존의 데이트폭력이라는 이름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낭만적인 로맨스로 오인하기 쉽다는 이유로 교제폭력이라고 새롭게 명명되고 있는 현상도 이 같은 사각지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마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는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성희롱을 포함하여 스토킹 범죄와 디지털 성범죄는 물론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 즉 교제폭력 또한 여성폭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교제폭력에 관한 별도의 처벌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다른 여성폭력 범죄에도 교제폭력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관련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되었으나 지난 국회에서 폐기되었거나 여전히 계류 중이다. 스토킹 범죄의 경우도 사각지대에 속해 있었으나 사회에 충격을 준 강력범죄가 발생하고 나서야 처벌법이 겨우 국회를 통과했다. ‘죽어야 사는 여성의 인권’이라는 말을 또다시 씁쓸하게 떠올리게 된다. 또한 정부가 교제폭력에 대한 실태 파악이나 통계 구축도 하지 않으면서 여성가족부 폐지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담론 싸움에 매몰돼 정작 여성폭력에 대해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뼈아픈 일이다.

가정폭력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는 테드 강연에서 “학대는 오직 침묵 속에서만 자라난다. 그것을 막는 힘은 바로 그곳에 불빛을 비추는 것으로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친밀함의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교제폭력은 여전히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지금, 우리는 지속적으로 바로 이곳에 빛을 비추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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