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미술관을 즐기는 나라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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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 콘텐츠관리팀 선임기자

독일 K21·인젤 홈브로이히 등
도시마다 매력적인 미술관 산재
장벽 없이 다 같이 즐기는 예술

독일 여행을 하며 사람들이 미술과 미술관을 즐기는 모습을 자주 발견했다. 사진 왼쪽은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알테 나치오날 갈러리)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특별전에서 뮤지엄 체어를 이용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모습. 오른쪽은 뒤셀도르프의 K21 미술관 0층 로비에 놓인 빈백 위에 시민들이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독일=오금아 기자 chris@ 독일 여행을 하며 사람들이 미술과 미술관을 즐기는 모습을 자주 발견했다. 사진 왼쪽은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알테 나치오날 갈러리)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특별전에서 뮤지엄 체어를 이용해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모습. 오른쪽은 뒤셀도르프의 K21 미술관 0층 로비에 놓인 빈백 위에 시민들이 앉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독일=오금아 기자 chris@

“독일에 가고 싶다.”

동네 책방에서 구입한 책에서 시작된 생각이다. 〈독일 미감〉에 소개된 뒤셀도르프 미술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립미술관의 소장품을 볼 수 있는 K20과 K21에 관심이 갔다. 상품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미술관 이름도 재미있고, 오래된 주의회 의사당을 개조한 K21에 대한 설명이 흥미로웠다. 독일에서 컬렉터가 가장 많이 산다는 지역의 미술관 소장품은 어떨까도 궁금했다. 올해 장기근속 휴가 대상자가 되면서 머릿속 독일행을 실천할 기회가 왔다.

지인들이 인근 다른 미술관도 추천했다. 노이스에 있는 ‘인젤 홈브로이히’, 쾰른 대교구 미술관 ‘콜룸바’, 초콜릿 사업가 부부의 작품 기증으로 만들어진 ‘루드비히 미술관’이 리스트에 올랐다.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과 ‘함부르거 반호프’까지 지난달 독일 여행에서 총 7곳의 미술관을 찾아갔다. 방문지마다 미술관 건물이나 운영 방식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시 운도 좋았다. 기차 시간을 바꿔 찾아간 K20에서는 힐마 아프 클린트와 바실리 칸딘스키 2인전을 봤다. 지난해 말 다큐로 알려진 최초의 추상화가 아프 클린트의 작품 앞에서 감탄했다.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에서는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탄생 250주년 기념 특별전을 예약 없이, 틈새 시간에 관람하는 행운도 누렸다. 각 미술관 소장품 전시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세계적 거장부터 잘 몰랐던 독일 작가들의 명작까지 아울러 보여줬다.

여행을 준비하며 읽은 〈독일 미술관을 걷다〉에는 독일인의 유별난 미술관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책은 2010년 기준으로 독일 전역에 6200여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고 소개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시설이 16개 연방의 도시마다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국민 전체가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공평하게 누린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독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과 예술 공간을 즐기는 장면을 목격했다.

미술관 관계자가 ‘강추’한 인젤 홈브로이히는 뒤셀도르프에서 차로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카를-하인리히 뮐러는 버려진 목초지를 야외 미술관으로 바꿨다. ‘풍경과 건축과 예술의 앙상블’을 목표로 한 미술관에서 관람객은 지도를 보며 들판 위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전시장을 찾아간다. 때론 비어있는 건물 자체가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곳에는 작품 설명문이 없다. 관람객은 정보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감각으로 예술을 받아들인다. 전시장 지킴이나 금지 사항 푯말도 없다. 안내문을 보니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즐길 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관람 후에는 입장료에 포함된 카페테리아의 간소하지만 건강한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지팡이를 짚고 온 노인, 가족과 함께 온 아이들이 산책하듯 놀이하듯 예술과 자연을 느꼈다.

K21 미술관은 궁처럼 보이는 외관과 현대적 내부, 유리 돔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0층(1층)과 꼭대기 층 로비에 빈백을 두고 누구나 누워서 건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현지 청소년들이 빈백 위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기차역 건물을 개조한 함부르거 반호프 현대미술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봤다. 정원과 미술관 내부 곳곳에 비치된 캠핑용 간이의자에서 젊은이들이 쉬고 있었다. 미술관의 역사를 소개하는 전시장의 유리 벽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때 기차역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과 작은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뒤쪽 전등의 ‘MUSEUM’ 글자가 초록 자연 위에 반사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독일인은 일상 가까이에서 미술과 미술관을 즐기고 있구나.

미술관을 즐기기 위해서는 장벽도 없어야 한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프리드리히 특별전은 관람객 연령대가 높았다. 북적이는 전시장 안에서 이동형 뮤지엄 체어에 앉은 두 할머니를 봤다. 마음에 든 그림을 차분하게 감상하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일정인 이탈리아 베니스에서도 무장벽 전시 관람을 봤다. 피카소, 달리, 모딜리아니 등 거장의 작품이 즐비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일부 작품 아래 안내판이 눈길을 끌었다. 점자 설명과 함께 르네 마그리트, 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그림 도상을 시각장애인이 손으로 만져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국에도 도입되어 있지만 아직 흔하지 않은 풍경. 국내 미술관에서 더 자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독일 미술관의 저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문화를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 차별 없는 예술 향유권을 위한 정책과 예산 지원, 기증 문화의 저변 확대, 성숙한 관람 문화 등이 합쳐진 결과다. 언젠가 부산의 미술관이 누군가의 여행 목적지 1순위에 오르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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