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부산진성 우주석
‘남쪽은 (조선의) 목구멍과 같다(남요인후).’ ‘서문을 자물쇠같이 튼튼히 지켜야 한다(서문쇄약).’ 부산 동구 범일동 부산진시장 맞은편 부산진성에 가면 이런 문구를 새긴 돌기둥 두 개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서문 성곽 양쪽에 세워져 있는 우주석(隅柱石)이다. 우주석은 집이나 성 모퉁이 경계에 세운 돌기둥.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조정은 물론 부산 사람들은 부산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통감했을 터이다. 조선의 목구멍과 같은 곳, 남쪽 부산을 지키지 못해 참혹한 일을 당했으니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지 말자는 굳은 결의를 돌덩이 깊이깊이 각인한 것이다.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첫 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공간이다. 조선 후기 300년간 한일 교류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성이 철거되면서 그 흔적은 사라지고 만다. 복원의 길이 열린 계기는 1974년 정화 사업. 동서남북 4대문 가운데 동문인 건춘문과 서문 금루관, 장대(장군 지휘소)가 있는 남문의 진남대가 복원됐다. 부산진성은 이에 앞서 1972년 부산진지성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시 기념물에 등록됐는데, 한편으로 자성대라 불리기도 했다. 사실상 동네공원 수준의 대접을 받으며 방치돼 온 아픈 역사가 있다.
그즈음 복원된 것이 서문 성곽 우주석이다. 이를 국가지정유산인 보물로 만들자는 시민운동이 시작됐다는 소식이다.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게 이들의 목소리. 경주 왕릉의 봉분 각 모서리에 세워진 석물 정도가 있긴 하나 성문 모퉁이에 세워진 우주석은 그 사례를 찾기 힘들다고 한다. 국방에 대한 선조들의 강한 의지가 담긴 문화재로서 그 의미가 더없이 크단 뜻이다.
역사적 유래와 시대적 의미 또한 남다르다. 오른쪽 돌기둥 ‘남요인후’ 문구 아래 ‘임신하(壬申夏)’라는 글자와 함께 여타의 각종 문헌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제작 연도는 임란 이후 첫 임신년인 1632년으로 좁혀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 해는 조선이 두모포에 다시 왜관을 허용하면서도 일본의 재침략을 경계하던 시기다. 북으로는 청나라, 남으로는 일본을 경계하는 절박한 심사가 우주석 형태로 나타났다고 볼 타당한 근거다.
선조들은 우주석까지 세워 나라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을 자물쇠 같은 곳이라고 못 박았다. 부산을 국방의 요지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부산은 ‘자존’의 땅이다. 부산 시민이 꿋꿋이 그 보루를 지키며 살고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