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지기와 약혼자 있어도 무연고 사망자로 [연결:다시 쓰는 무연고자의 결말]
①닿지 않는 부고
#약혼자 있어도 무연고 사망 처리
보라색과 라벤더를 좋아했던, 웹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투병 중에도 밝고 친구들과 수다떨기 좋아했던, 옆집 할머니와도 싹싹하게 알고 지냈던, 한 고양이의 집사.
지난해 8월 부산 중구의 한 병원에서 자립청년 김새빛(가명) 씨는 36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성년이 된 후 보육원에서 나와 혼자 힘으로 거친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내던 새빛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까지 병마와 싸웠지만 끝내 세상을 등졌다.
30년 지기 친구 주영(가명)과 약혼자 경훈(가명)은 새빛과의 이별이 머지 않았음을 어렴풋하게 가늠하곤 했다. 경훈은 타지에서 일하는 탓에 새빛을 매일 보러오진 못했지만, 주영은 사망 전날 밤에도 새빛을 찾았다.
그러나 막상 접한 그녀의 죽음은 한번에 꿀꺽 삼켜지는 슬픔이 아니었다. 친구와 연인 자격으론, 너무 이른 나이에 저버린 새빛의 마지막을 잘 매듭지어 줄 권한이 없었다. '남'으로만 규정될 뿐, 죽어서는 아무것도 해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새빛의 짐을 챙겨가라는 병원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엔 이미 공영장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영정 사진도 없는 빈소엔 새빛의 짐이 담긴 캐리어 가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허락된 추모의 시간은 고작 4시간. 그녀와의 숱한 추억을 되새기며 애도하기에는 너무나 짧았다.
억울했다. 새빛이 무연고 사망자임이 확인되고 공영장례 대상자로 분류된 뒤, 반나절만에 빈소가 차려지기까지 주영과 경훈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느 가족에게 그러듯 이들에게 장례나 장지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곳은 없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 역할을 했지만, 무연고 사망이라는 행정절차 앞에선 그저 타인이었다. “새빛이 병이 심각해지기 전에 친구에게 미리 마지막을 부탁하고 (절차를) 안내 받을 수 있었다면 적어도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텐데….” 후회하고 자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무연고자 시신은 화장 후 부산영락공원 지하 무연고자실에 5년간 보관하다 산골 하는 것이 원칙. 남겨진 이들의 의사와 달리 이미 차려진 공영장례 빈소 앞에서 이후 장례절차를 주관하겠다고 주장하기에도 늦은 시점이었다. 가슴에 묻는 것 말곤 방법이 없는 듯 했다.
망연자실한 채 빈소에서 울고 있던 주영과 경훈은 우연히 공영장례 부산시민 조문단을 만났다. 부산시민 조문단은 무연고 사망자의 죽음이 외롭지 않도록 빈소를 다니며 공동으로 조문하는 단체이다. 이들의 사정을 접한 조문단의 도움으로 구청 담당자와 연락할 수 있었고, 유골만이라도 무연고 사망 처리 되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안타까운 사연을 알아본 구청 담당자의 이해 덕분에 새빛의 유골함은 다른 봉안당에 보관할 수 있게 됐다.
새빛을 온전하게 추모하기 위해 도움을 받은 건, 병원에서의 보호자 자격도, 지자체의 연고 수색 과정도 아니었다. 남겨진 이들이 부여잡은 건 공영장례 제도를 잘 아는 한 시민단체와의 우연한 만남과 구청 담당자의 양해였다.
#약한 고리로 연결된 사회적 가족
새빛과 지인의 사연은 부산시민 조문단으로 봉안 과정에 도움을 줬던 부산반빈곤센터 최고운 대표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됐다. 새빛의 죽음은 무연고자의 사후가 사회적 가족과 손쉽게 단절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회적 가족의 장례주관 길이 열렸지만, 연고 중심의 사후처리 과정에서 '약한 고리'인 이들의 관계는 우연과 양해가 겹치지 않는다면 쉽게 배제되고 만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와 생전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친분 관계를 맺은 사람이나, 망자가 생전에 유언 등으로 지정한 사람이 희망하면 장례를 주관할 수 있다. 장례주관자로 지정되면 장례 방식을 선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봉안 방식까지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장례주관 신청 주체인 '친분 관계를 맺은 사람'은 사망 소식을 제때 접하고 무연고 시신처리 절차가 시작되기 전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빈소가 차려지기 전에 사망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사후 신청제인 장례주관자 신청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행정기관이 사망자의 연고를 찾아 사망사실을 알리고, 시신인수 의사를 묻는 범위는 부모, 자녀, 배우자, 형제·자매, 부모 이외 직계 존속, 자녀 이외 직계 비속이다. 이들에게 연락한 후 무연고자임이 판단되면 바로 공영장례 절차가 시작된다.
새빛과 주영, 경훈의 관계는 공적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다. 지자체가 모든 무연고 사망자의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파악할 수도 없다. 주영과 경훈이 새빛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구청에 달려가 장례주관을 주장할 수 있었다면 몰라도, 연고 수색이 순식간에 끝나고 빈소가 마련된 터라 개입의 여지는 낮았다.
사후에 단절되는 상황이 우려된다고 해서 생전에 미리 신청할 수도 없다. '무연고자'라는 명칭을 붙이는 시점은 일단 사람이 죽고난 뒤 연고 수색이 끝난 이후이기 때문이다. 장례주관자 신청서에 쓸 수 있는 건 오로지 신청자와 사망자에 대한 정보뿐이다.
공부상 확인되지 않는 친분 관계에 있는 사람과 망자간 관계를 확인할 수 없어 답답한 건 행정기관도 마찬가지다. 사망사실을 알고 신청자가 찾아오더라도 그의 주장만으로 진정성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산 한 구청 관계자는 “사실혼 사이여도, 관계 증빙이 어렵다면 먼 친척이라도 설득해 오라고 안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구청 관계자는 “복지기록에 관계의 흔적이 남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가족이 찾아올 수 있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장례주관 자격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매우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사후 자기결정권·추모할 권리 보장을"
26일 부산시 등에 따르면 2019년 237명이던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23년 619명으로 기록됐다. 지난해의 경우 시신인수 거부에 따른 무연고 사망자는 444명, 공부상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데 따른 무연고 사망자는 175명이었다.
부산에서는 지난해부터 공영장례가 시작돼 무연고자 또한 존엄한 최후를 맞을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이 마련됐다. 그러나 여전한 연고 중심의 장례 문화가 고착화돼있어 지인과 이웃 등 사회적 가족이 개입할 빈틈은 매우 좁다.
1인 가구 증가와 무연사회 확장 속에 존엄한 죽음과 사후 자기결정권 보장의 해답은 사회적 관계에 있고, 그 관계가 개입될 수 있도록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김경일 부산시 인권위원장은 “무연고자라 하더라도 친구나 이웃, 생활공동체를 함께한 동료는 있다”며 “무연고 사망자가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건 평생 고독하게 살아서가 아니라, 망자의 사망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아 생전 관계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장례문화진흥원 윤강인 대리는 “기존 공영장례에서 지자체가 시신 처리에 관한 사항을 장례업체에 맡겨 처리한 것을 명문화하던 수준에서, 장례주관 제도로 패러다임이 진일보한 것은 맞다”면서도 “공영장례 지원 대상자와 장례주관자의 의사가 우선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최소한의 요건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