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단 한 번이라도
신호철 소설가
‘했다’라는 영역 못지않게
‘해 보지 않았다’도 똑같이 중요하다
하얗게 표현되어야 할 부분은
어떠한 색으로도
얼룩지지 않아야 한다.
한 번이라도 해 보고 싶은데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쉽지 않다는 기준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용기가 없어, 건강이 허락지 않아, 시간이 없어, 혹은 큰 비용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뭔가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것들임은 분명하다. 필자는 세계 여행을 하고 싶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하고, 북극의 오로라를 보고, 패러글라이딩도 해 보고 싶었다. 낚시로 40㎝가 넘는 돔을 잡아 보고 싶기도 했다. 30대엔 그랬었다.
50대 후반이 된 지금은 밤하늘에 환한 별을 보고 싶다. 모닥불을 피워 놓은 어느 황량한 초원의 밤 풍경을 TV로 본 적이 있었다. 그곳의 밤하늘엔 눈부시게 밝은 별이 설탕처럼 뿌려져 있었다. 하늘엔 정말 온통 별이었다. 사실, 실제로 그런 별을 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시력 때문이다. 백내장 수술 후에 시력이 더 나빠져 이젠 별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여름밤, 평상에 누워 은하수를 보고, 또 별똥을 보며 소원을 빌었던 유년의 기억이 더욱 애틋해졌다.
그런 감상 덕분에 버킷 리스트라는 것을 흉내 내어 몇 줄 끼적거리게 되었다. 패러글라이딩은 지금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전문 강사에게 배워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러 보고 싶다. 덧붙여 전자기타를 배워 게리 무어의 ‘스틸 갓 더 블루스(Still Got the Blues)’를 멋들어지게 연주해 보고 싶다. 그렇게 하나씩 꼽아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런 게 왜 하고 싶지? 이게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어 꼭 해보고 싶다고 고집하는 걸까? 그냥 멋있어 보여서 해 보려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보니 당장 대답이 궁했다. 하지만, 내 삶에 별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기엔 뭔가 억울하다.
그래서 그림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까지 그려냈던 내 삶의 그림. 어떤 곳은 색칠되어 있고 어떤 곳은 비어 있다. 색칠된 곳은 내 삶의 일부였다. 어떻게 경험했느냐에 따라 색깔은 다를 것이다. 하얀 여백은 내가 한 번도 발을 디디지 않은 영역이다. 그렇게 경험한 것과 비워진 것들로 그려진 내 삶의 그림은 얼마나 근사한 모습일까? 문득, 이진법에서 사용하는 1과 0이라는 개념이 생각난다. 1은 있다는 것. 즉, 존재하는 것이고, 0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나는 세상의 중요한 법칙 중의 하나가 바로 0과 1의 교차라고 생각한다. 미래에 펼쳐질 것이라는 AI, 즉 인공지능도 결국은 1과 0만을 사용하는 이진법으로 작동되지 않은가. 뭔가를 구분하는 선을 긋더라도 그것을 확대하면 수많은 ‘있다’와 ‘없다’의 집합이고, 결국 최종적으로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있다’와 ‘없다’의 차이가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릴 냈다. 그림이라는 것에도 당연히 여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칠한 ‘했다’라는 영역 못지않게 ‘해 보지 않았다’라는 여백도 똑같이 중요하다. 특히, 하얗게 표현되어야 할 부분은 어떠한 색으로도 얼룩지지 않아야 한다.
한데, 내 그림을 되짚어보니 회색으로 번진 부분이 정말 많았다. 그것은 한 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렸을 때 생겨난 얼룩이다. 운이 좋다면 그 얼룩을 다른 선의 음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 음영과 구분될 새하얀 여백이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 여백으로 쓸만한 것이 아직은 꽤 남아 있다. 나는 써 내려가던 노트의 줄을 바꿔 또 한 줄의 메모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안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