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거부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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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자유가 지닌 두 개의 얼굴
‘할’ 자유와 ‘하지 않을’ 자유

정치공동체 속해 있는 인간
법적 구속에 자유롭지 못해

남용 논란 대통령의 거부권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사돼야

흔히 자유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떠올리지만 자유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을 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자유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자유는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는 자유나 잠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자유와 같이 어떤 욕망을 느끼고 그 욕구를 실현할 때의 자유를 말한다. 반면 후자의 자유는 예컨대 숙제를 하고 싶지 않을 때 숙제하지 않을 자유와 같이 무언가를 추구하기보단 회피하고 싶은 욕구를 실현한다.

우리는 보통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하기 싫은 걸 하면서 사는 데 익숙하다. 쇼핑을 하고 여행을 가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대개 돈이 필요하고 그러므로 돈을 벌기 위해 예컨대 회사에 가기 싫어도 출근길에 오른다. 만약 출근하지 않을 자유를 택한다면 그에 따라 양보한 보상만큼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희생하고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자유는 대립적이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는 채우고 채워도 인간의 욕망인지라 한계가 무제한적이다. 보통 욕구로 발현하고 소비로 실현되는 패턴의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는 아마도 자본주의 소비문화와 유관한 듯 보인다. 반면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하기 싫은 회피 욕구의 목록들은 화수분처럼 늘어나기보다는 꽤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연결해 본다면 한국과 일본 청년 사이에서 나타났던 트렌드인 파이어족과 프리터족 문화의 차이를 들 수 있다. 파이어족은 ‘얼마’가 있으면 자유로워진다는 각자의 설정기준에 따라 그 목표기준을 채우기 전까지는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를 포기하고 감수하면서 향후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를 바라보는 개념이었다. 반면 프리터족은 당장의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를 택하였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포기해야 하지만 대신에 가기 싫은 직장을 떠나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유롭게 살겠다는 개념이었다.

앞서 우리는 하고 싶은 걸 하는 자유에 친숙하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영국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강조했던 적극적 자유와 맞닿는다. 벌린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소극적 자유로, ‘무엇을 행하기 위한 자유’를 적극적 자유로 구분해서 정의하고 전자를 추구될 바람직한 자유라고 주장했다. 한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매번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하지 않을 자유를 택하는 주인공 바틀비가 보여주는 생경함을 기억한다면, 벌린이 제시한 적극적 자유는 근대적 사고에 지배적인 방향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유도,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도, 결국에는 모두 이룰 수 없다. 아무리 가진 능력이 출중하고 자원이 풍부해도 그 시도는 언제라도 실패한다. 즉,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두 상충하는 욕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만약에 하고 싶은 욕구가 불법적인 행위라면 이는 실행될 수 없다. 그럼에도 종종 실현되는 경우를 목격하곤 해서 사회적 문제가 된다. 예컨대 마약을 하고 싶은 유혹이 들더라도 마약은 불법 행위로 허용되지 않기에 이룰 수 없는 자유의지이지만 마약이 유통돼서 사회문제로 불거지곤 한다. 이러한 금지된 자유의 실현은 시장경제가 그리는 균형모델처럼 암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존재할 때 거래수단인 돈이 있다면 불법적이지만 구매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능력과 자원이 아무리 많더라도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는 정말로 모두에게 동등하게 박탈된다. 자유를 침해하는 대표적인 주체는 국가 혹은 정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국적과 시민권을 받음으로써 동시에 시민의 의무가 주어진다. 교육받고 싶지 않아도 교육받아야 하고 세금을 내고 싶지 않아도 납세의 의무가 주어진다. 주권국가 체제 아래서 어떤 정치공동체에 속하고 시민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설령 자신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지켜야 할 ‘의무’이기에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자유는 어쩌면 영영 이룰 수 없다.

그런데 법적으로 이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거부권을 가진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는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그러한 자유가 있다. 논리가 적절하다면 이 사실만으로도 대통령이 지닌 권한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 위치가 얼마나 특별한지 새삼 상기할 수 있다. 유례없이 많은 거부권을 행사 중인 이번 정부를 통해 거부권이라고 불리는 대통령의 재의요구권 남용 논란이 불거졌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평등한 민주정치에서 대통령이 지닌 거부권이 도구적 특권이라면 가능한 소극적으로 신중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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