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망각과의 투쟁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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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생환한 유대인이다. 그는 생지옥의 경험을 여러 작품에 녹여내는 것으로 존재의 근거를 삼았던 사람이다. 부여된 별칭은 ‘증언 작가’. 그는 시대를 증언하기 위해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문학에 매달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온몸으로 증언한 진실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져 갔기 때문이다. 그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세상의 망각이었던 셈.

망각과의 투쟁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비극은 기억되지 않는 한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바다의 서쪽에 아우슈비츠가 있었다면 그 동쪽은 일제의 잔혹한 전쟁 범죄로 얼룩졌다. 그중에서도 강제동원 위안부들의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들을 기리고 비극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 것이 평화의 소녀상이다.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건립된 이후 부산을 비롯해 전국으로, 해외 각지로 퍼져 나갔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이탈리아 사르데냐섬 스틴티노시에도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이다. 해외 소녀상으로는 14번째, 유럽에선 독일 베를린에 이어 두 번째다. 22일(현지시간) 제막식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은 ‘소녀상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 세계 곳곳의 소녀상은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철거 위협을 받고 있다. 이번 소녀상 설치도 일본의 방해로 진통을 겪었는데, 베를린 소녀상은 설치 4년 만에 철거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소녀상은 수난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 4월 부산 동구 소녀상은 ‘철거’라고 적힌 검은 비닐봉지로 덮였고, 주변은 먹다 남긴 초밥과 일본산 맥주로 어질러졌다. 소녀상 훼손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요 시민들에 대한 우롱이다. 그럼에도 국내외 소녀상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는 너무나 소극적이다.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에게 희망은 있는지. 진정한 뉘우침은 가능한지. 살아생전 프리모 레비의 다음과 같은 절규를 대답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과거를 다시 경험하도록 단죄받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르는 범죄, 그 참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것. 평화의 소녀상이 그런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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