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제 자리에 선 거제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불씨는 남았다?
민주노총 거제지부 28일 결의대회서
장승포항 ‘평화의 소녀상’ 옆 기습 설치
“아픔 기억할 중요한 상징” 의미 부여
거제시 “법률 검토 후 대응” 여지 남겨
“노동자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고통받은 역사를 기억하고 대일 역사정의를 실현하겠습니다”.
경남 거제 ‘평화의 소녀상’ 곁에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 노동자 넋을 기리는 조형물이 건립됐다. 노동계를 중심으로 민간 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한 지 1년여, 거제시 딴죽에 설 곳을 못 찾아 화물차에 실린 채 시청 주차장에서 시위를 벌인지 45일 만에 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일부 반대 여론이 여전한 데다, 거제시도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 당분간 진통이 예상된다.
민주노총 거제지역지부는 지난달 28일 장승포항에서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부·울·경 노동자 결의대회’를 열고 거제문화예술회관 내 평화의 소녀상 옆에 노동자상과 표지석을 설치했다.
거게 노동자상은 갈비뼈가 드러나는 깡마른 체구에 오른손엔 곡괭이를 들고 왼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무엇가를 그리워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표지석에는 ‘일제는 장승포항을 통해 노동자들을 일본, 중국, 남태평양 등으로 강제징용했다. 인간 존엄이 짓밟히는 고통스런 삶을 겪어야만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기억한다.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고 다시는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거제시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운다’는 글귀를 새겼다. 실제 일제강점기 거제 장승포항은 일본 어업자본가 거점이자 일제 전장으로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한 입영준비훈련소가 있었다.
거제지부는 “아직도 이들의 희생을 제대로 기억하고 기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단순한 동상 아니다. 선배 노동자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하고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중요한 상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고 내가, 우리가 증인이 돼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투쟁의 증표”라며 “친일매국 행보에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 덧붙였다. 참가자들은 헌화와 묵념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추모했다. 이 과정에 일부 반대 시민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로써 1년 넘게 반복된 노동자상 건립 논쟁은 일단락하게 됐다. 그러나 시유지에 무허가로 세워진 만큼 불씨는 여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공조형물은 ‘거제시 공공조형물의 건립 및 관리 등에 관한 조례’에 따라야 한다. 시는 “법률적 검토를 통해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토대로 철거 계고장을 보낼지 토지이용사용료를 부과할지 등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 인해 법적 분쟁 등 또 다른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거제지역지부 등 24개 노동단체와 거제경실련 등 11개 시민사회단체, 더불어민주당 거제지역위원회 등 5개 정당 등은 작년 5월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 거제건립추진위원회’를 꾸렸다. 시민 모금으로 제작비 4000만여 원을 마련해 동상을 완성, 작년 11월과 올해 1월 거제시에 건립 허가를 요청했지만 시 공공조형물건립심의위원회는 두 차례 모두 부결했다.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추진위가 제안한 부지(평화의 소녀상 옆)도 노동자상 건립지로 타당하지 않고 반대 여론도 적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에 추진위는 “친일 반민족 결정”이라고 반발하며 노동자상이 실린 화물차를 시 청사 주차장 한쪽에 세워두고 매일 규탄 집회를 이어왔다. 최근엔 민주노총 각 지역본부가 연일 거제시 규탄 기자회견을 여는 등 갈등을 빚었다.
한편,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은 2017년 전국적으로 시작돼 현재 8개 시군에 총 9기가 건립됐다. 경남에는 창원시 성산구 용호동 노동자상이 유일하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