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부국의 조건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세계해양포럼 기획위원장
‘제도’는 국가 흥망성쇠 좌우 중요 요소
무역 의존도 높은 국가 해양력 강화 필요
미국 등 해운·조선 산업 육성 움직임
우리는 대통령 직속 해양위원회 설치를
산업혁명은 18세기 중반 기계와 에너지를 결합해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토대로 교통과 통신 분야가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고 사회·경제 전반의 구조 변화도 급속도로 촉진됐다. 그러나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면서 지금의 기후 위기를 자초한 측면도 크다. 각국은 이런 이유로 탄소세라는 세기의 청구서를 받아들였다. 물론 친환경 기술 개발을 촉진하고 에너지 효율성 제고라는 새로운 시대가 그 덕분에 열린 것도 사실일 테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기후 위기는 새로운 미래의 기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모두가 부자와 부국(富國)을 꿈꾸지만, 그 꿈이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큰 국토와 자원을 지녔고 더 많은 인구를 보유했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에 지배되고 빈국으로 추락한 사례는 흔하다. 도대체 부국의 조건은 무엇일까.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카메르 대런 애쓰모글루 경제학과 교수는 제임스 A 로빈슨 교수와의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제도’를 꼽았다. 특히 포용적 제도가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의 원천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경제성장은 포용적 경제 제도를 통해 이뤄지고, 포용적 경제 제도는 포용적 정치 제도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북한의 경제적 우위가 전복된 것도 바로 이 제도 때문이라고 그는 예시했다.
기후 위기로 에너지 대전환 시대를 맞은 지금, 어떤 제도로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작금의 잦은 정쟁은 제도 개혁의 단추를 잘못 채울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국가 미래를 고민해도 부족할 판에 끊임없는 갈등과 정답 없는 논쟁으로 국민은 극도의 피로감에 젖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용적 정치 제도가 어떻게 구축되며, 지속 가능한 경제 제도가 언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라면 모든 제도의 중심에 ‘해양력 강화’라는 무게추가 꼭 필요할 텐데, 오히려 다른 국가에 비해 해양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듯하다. 사실 오랫동안 해운 경쟁력에 무관심한 미국도 최근에는 중국의 해양 굴기에 맞서 해운과 조선 산업을 다시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미 의회는 국가 해양전략을 위한 의회 지침을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의 공동 성명으로 발표했고 이를 미 해군이 지난달 채택했다. 중국의 해양 패권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른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해도 해운과 조선 산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실제로 세계 무역의 80%가 해운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그만큼 해운은 부국강병에 중요한 요소다.
미 의회의 해양전략 지침 보고서에 따르면 국가 간 외항 운송을 담당하는 선대는 미국 국적은 200척 이하지만, 중국 국적은 무려 7000척을 웃돈다고 한다. 왜 지금 시점에 미국이 해양력 회복을 다시 외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미 의회는 이를 위해 미국 정부가 당장 해야 할 정책 열 가지를 지침에 담았다. 그중에는 조선 인력과 선원 양성을 위한 전략도 포함돼 있다. 또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야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선박에 대해서도 지원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제도 정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오랫동안 유지된 존스 액트(Jones Act) 개정을 의미할 수 있다. 1920년에 제정된 존스 액트는 미국 내에서 선박 수송 시 운항하는 선박은 미국 내 소재하거나 미국인이 소유 또는 운영하는 항구나 시설 등을 이용하도록 강제하면서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 법 때문에 동일한 선형의 선박 가격이 한국이나 일본에서 건조한 것보다 무려 다섯 배나 차이가 난다는 지적도 있었다.
혁명이라고 하면 으레 격렬하고 급진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산업혁명은 오히려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기술 혁신의 과정이라고 영국의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진즉에 주장했다. 그만큼 그 결과는 더 강력하고 치명적일 수 있다. 위기가 곧 기회인 대전환 시대에, 지금부터라도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국익을 걱정해야 한다. 부강한 국가의 첫 번째 조건이 제도라면 말이다. 특히 반도체 규제처럼 조선과 해운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필자가 여러 차례 주장했듯이 ‘대통령 직속 해양위원회 설치’ 같은 선제 대응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