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쌓인 한지, 리듬을 만들다
데이트 갤러리, 박석원 ‘적의’전
추상 조각 거장, 부산 첫 전시
재료 성질 그대로 살린 쌓기 작업
캔버스 위 한지를 찢고 붙여 완성
“역시! 데이트 갤러리 전시 작품은 직접 봐야 한다니까요!”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자리 잡은 데이트 갤러리는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며, 국제적으로 조명 받고 있는 단색화, 전위예술, 조각에 이르기까지 장르 간 균형을 맞추고 재조명하며 심도 있는 전시를 이끌어 가고 있다. 단색화라는 용어가 제대로 정립되기도 전부터 데이트 갤러리 김경애 대표는 단색화 거장의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김 대표는 미학적,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전시가 되도록 고민한다. 전시 작품들이 심미안을 자극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길 희망한다”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 역시 김 대표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재 데이트 갤러리는 한국 추상 조각의 거장이자 평면 회화로도 작품성을 인정받은 박석원 작가의 전시를 열고 있다. 1942년생으로 이제 80대에 접어들었지만, 정작 부산에서 처음 열리는 개인전이다. 박 작가는 1968년, 1969년 국전에서 연이어 국회의장상을 수상하며 20대의 나이에 벌써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군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파리미술관, 후쿠오카시 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현대 조각사에 핵심 인물로 인정받았다.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 양성과 더불어 평생 치열하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부산 전시에선 1980년대 시작된 ‘적의’(積意) 시리즈에서 변형된 평면 회화를 많이 내놓았다. 적의, ‘의미를 쌓는다’는 뜻이다. 돌이나 철판, 나무를 기하학적으로 쌓는 행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원래의 자연 재료들을 쌓아 작가만의 독특한 미학을 지닌 조각이 되지만, 그걸 해체하면 원래의 자연 그대로 돌아가게 된다. 작가는 재료를 쌓으며 안정적인 구조를 찾고 자연과 협업하며 적극적으로 작품을 구축한다. 돌의 돌다움, 금속의 금속다움, 나무의 나무다움을 부정하지 않고 그 자체의 물질적 특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안정적인 구조를 찾고 그게 곧 작품이 된다. 자연이든 인생이든 예술이든 본질적인 구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조각가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지만, 사실 작가는 원래 회화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조각 작업 역시 공간에 그린 획이나 점 같이 느껴진다.
“재료의 물성을 살리면서 평면으로 쌓기를 시도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한지를 선택했습니다. 직접 만든 캔버스 위에 한지를 찢어서 캔버스 위에 붙이는데 이건 조각에서 쌓는다는 개념과 일치합니다. 붙여진 종이들끼리 쌓는 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수평선을 떠올리는 평행 배열과 여러 조합의 구성이 나오기도 합니다.”
평면 회화 작업을 한다지만, 박 작가에게 물감은 한지이다. 어떤 색의 한지를 쓰는가에 따라 작품 전체의 색감이 달라지고, 한 작품에 하나의 색 한지만 사용한다는 점에서 단색화 작품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다. 붙이고 쌓은 한지 사이에 날 것으로 드러나는 캔버스 여백은 3차원 조각 작품처럼 자연을 품고 있는 듯하다. 숨구멍 같기도 하고, 바람길 같기도 한 여백의 미는 거장이 만들어낸 미학이다.
전시에는 적의 시리즈 한지 작품들과 함께 거대한 금속 조각도 만날 수 있다. 자연적으로 생긴 금속의 구멍을 그대로 살린 것 역시 인간과 자연이 대화하는 방법인 것으로 느껴진다. 전시는 7월 10일까지 열린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