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사로잡은 이배, 부산서 판 펼쳤다
21일까지 조현화랑 ‘흐르는’전
조각·회화·영상 넘나드는 작품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도 성공
과거와 달리 요즘 미술 작가들에게 어떤 장르인지 묻는 건 의미가 없다. 물론 대학교에서 전공 분야가 있고 자신이 좀 더 잘하는 영역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 가지 영역으로 자신을 분류하거나 가두는 걸 거부한다.
조현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이배 작가의 전시 ‘흐르는’에선 회화와 조각, 영상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장르를 한정하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확실히 느끼게 해 준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빌모트 파운데이션과 함께 대규모 개인전을 통해 전 세계 미술애호가를 사로잡은 이배 작가는 1년이 넘는 베니스 전시 준비 작업에 지칠 만도 한데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부산 전시에 몰두했다. 베니스 비엔날레를 가지 못하는 국내 팬들을 위해 작가는 조현화랑에 비엔날레급 전시를 펼쳤다.
청량한 숲 가운데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조현화랑 전시실 중앙에 자리 잡은 2m 90㎝ 대형 조각을 가장 먼저 만난다. ‘붓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조각은 사실 9개 개별 조각을 겹치고 붙여 제작했다. 넓은 전시장의 벽에는 9개의 조각이 평면 회화로 변신한 흔적이 있다. 캔버스가 아니라 벽에 직접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그린 작품 스트로크(붓질)이다.
벽의 이미지는 다시 거울에 비추듯 반전되어 바닥에도 다시 그려졌다. 벽과 바닥에 동시에 그려진 흔적은 마치 2차원과 3차원이 모두 존재하는 듯 느껴진다. 붓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림은 스스로 리듬을 만들고 앞 혹은 옆으로 퍼져나갈 것 같다.
평면 회화의 생동감은 2층에 설치된 18m 벽을 가든 채운 영상에서 제대로 표현된다. 조각과 회화를 넘어 매체의 확장성을 고민했던 작가는 베니스 전시와 이번 전시에서 영상 작업 ‘버닝’을 내놓았다. 지난 2월 청도에서 진행한 ‘달집태우기’ 불길과 회화 ‘붓질’을 그리는 작가의 움직임을 영상에 담고 작가의 움직임에 따라 붓질의 선이 나타난다. 유명 작곡가 토드 마코보가 영상에 맞는 첼로 연주곡을 작곡했고 음향 전문가까지 합세해 미디어아트 작품이 탄생했다.
7분 4초짜리 영상은 이배 작가의 움직임에 따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붓질이 그려진다. 딱 떨어지는 음악과 불멍 영상까지 등장해 관객을 압도하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같은 층의 천정에는 조각과 회화, 영상으로 표현된 작가의 움직임이 입체로서 매달려있다. 벽에 기대있거나 바닥에 놓여있기도 하다. 브론즈로 제작되었지만, 작가는 회화를 다루듯 겉면을 문질러 색을 덜어냈다.
이배 작가는 “이번 전시는 신체성과 순환에 집중했다. 고착화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틀을 깨고 본질에 다가가고 싶었다. 직관적으로 수용되는 순간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배 작가는 1990년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며 작업을 했지만, 서양 미술 재료 대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재료인 숯으로 줄곧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숯이 가지고 있는 삶과 죽음, 순환과 나눔의 관념에 작가 특유의 예술적 상상력을 더했다.
작가는 “숯에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이 존재하기 때문에 굉장히 매력적이며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사상과 매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재료”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선 붓질 조각과 회화 외에도 이배 작가의 움직임을 서양화 기법으로 캔버스에 기록한 아크릴 미디엄 시리즈 20점도 만날 수 있다. 흑백의 붓질 시리즈에 푹 빠질 무렵 알록달록한 색깔이 들어간 아크릴 미디엄 시리즈는 이배 작가의 또 다른 미학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배 전시는 21일까지 조현화랑에서 무료로 열리고 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