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신은 루이 14세, 프랑스 명품 산업 기틀 다졌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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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미술관 / 김선지

사치 지나쳐 프랑스 혁명 이어져
잠든 이야기 깨우는 ‘그림 역사책’
세상 보는 새로운 눈 갖게 만들어

루이 14세의 가족을 올림포스 신들의 모습으로 그린 장노크레 작 ‘루이 14세와 왕실 가족’. RHK 제공 루이 14세의 가족을 올림포스 신들의 모습으로 그린 장노크레 작 ‘루이 14세와 왕실 가족’. RHK 제공

무더위 속 유일한 낙이었던 2024 파리올림픽이 아쉽게도 저물어간다. 돌이켜보면 벌거벗은 디오니소스 신과 머리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가 등장한 올림픽 개막식은 파격을 넘어서 가히 혁명적이었다. 디오니소스로 분한 가수 필리프 카터린느는 “논란이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재미없겠죠. 만약 모두가 동의하고, 모두 같은 의견이라면 세상은 얼마나 따분할까요. 그거야말로 또 다른 파시즘이죠”라고 말했다. 과연 프랑스답다고 하겠다.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아무리 파리 올림픽 프리미엄 파트너라고 해도 공식 행사인 개막식에서 루이뷔통을 비롯한 명품 광고를 그렇게 대놓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건 진짜 실망스럽다. 한데 명품 브랜드는 대부분 프랑스 국적이다.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까르띠에, 지방시, 입생로랑, 크리스챤 디올, 발망, 발렌시아…. 파리는 어쩌다 세계 패션 산업의 메카가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사유하는 미술관> 속에서 답을 찾았다. 프랑스에는 “짐은 곧 국가다”라고 말한 루이 14세가 있었다. 루이 14세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아주 우아하고 위엄있는 초상화가 나온다. 그런데 태양왕으로 불리는 그가 주황색 하이힐이라니? 초상화는 64세 때 모습이라고 한다. 평범한 우리야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술적 감각을 타고난 왕이 그러는데 뭐 어쩌겠는가(루이 14세의 키는 160㎝ 남짓했다).


야생트 리고 작 ‘루이 14세’. RHK 제공 야생트 리고 작 ‘루이 14세’. RHK 제공

루이 14세는 의류, 섬유, 가구, 보석 같은 럭셔리 산업을 적극 육성했다. 최고 품질로 만들도록 엄격한 의복 제작 규정을 내놓기도 했다. 베르사유 궁전 내 모든 신하에게도 엄격하고 흠잡을 데 없는 옷차림 기준을 강요했다. 덕분에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 프랑스 인구 중에 섬유나 패션 산업에 종사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오늘날 프랑스 명품 산업의 기틀은 그가 닦은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기 마련이다. 사치스러운 베르사유 궁전의 생활은 루이 16세에 이르러 프랑스 혁명으로 폭발한다. 그 결과 마리 앙투아네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그녀가 시대의 희생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책 9장에 소개된 것처럼 ‘마리 앙투아네트를 괴롭힌 정치 포르노’가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국가에 무자비하게 퍼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그림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다양하고도 풍부한 정보가 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유하는 미술관>은 미술 작품에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는 ‘그림 역사책’ 같다. ‘왕과 비’, ‘성과 사랑’, ‘음식 문화’, ‘신앙과 종교’, ‘힘과 권력’, ‘근대 사회 빛과 그림자’라는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인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한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는 흑인 하인이 자주 등장한다. 왠지 정물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는 사람이다. 다 이유가 있다. 의뢰인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 않아도 단지 그림에 사치스러움을 보태기 위해 노예를 그려 달라고 요구했단다. 그림 속에 사회의 차별과 억압, 편견이 교묘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바뀌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그림 속 인물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가 62세에 죽었을 때 신문에는 허영심과 오만에 가득 찬 나르시시스트가 사망했다고 기사가 났다. 그녀의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과연 예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 3세 등 수많은 유력인사들과의 염문으로 더 유명한 여성이다.

그녀는 사진 촬영에 관해 아이디어를 내고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세세하게 지시했다. 맥베스 부인, 수녀, 매춘부, 심지어 관 속의 시체로까지 변신했다. 올도이니는 셀카의 개척자로 오늘날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최초의 패션모델이자 여배우, 그리고 예술가로 평가될 여지도 있어 보인다. 말년에는 종일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서 지냈다는 그녀가 이 사실을 알면 무척이나 기뻐할 것 같다. 그림을 통해 역사를 보니 풍성하고 다채롭다. 명화를 보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도 가지게 되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싶다. 김선지 지음/알에이치코리아/392쪽/2만 5000원.


<사유하는 미술관> 표지. <사유하는 미술관>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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