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꽃 피는 화려한 첨성대, 보는 재미 넘치는 경주박물관
경북 경주시 늦여름 여행
배롱나무꽃 화사한 첨성대 풍경 일품
보라색 맥문동 만개 계림 환상 분위기
백일홍, 천수국, 해바라기 ‘꽃의 향연’
아테네박물관 느낌 풍기는 경주박물관
화려한 세공품, 불교 미술품 깊은 인상
흥미 넘치는 영상 어린이에 인기 만점
경북 경주시 첨성대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경주에 가본 지 오래된 사람이라면 잔디만 깔린 황량한 들판과 맥주잔을 뒤엎은 것 같은 독특한 건축물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최근 첨성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른 장면을 떠올린다. 사시사철 온갖 꽃이 피어나는 화려한 정원이다. 여름~가을에는 배롱꽃, 백일홍, 해바라기는 물론 각종 화초가 첨성대 주변을 화사하게 장식한 풍경이다. 여기에 전시 스타일이 확 달라져 보는 재미가 넘치는 인근의 국립경주박물관도 있다.
온 세상을 영원히 불지옥처럼 달굴 것 같던 폭염이 조금씩 식어가는 걸 느끼면서, 어느새 곳곳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가을 향기를 느끼면서 훌륭한 사진 한 장을 건지러, 그리고 신라 유물의 아름다움을 즐기러 경주시 첨성대로 달려갔다.
■첨성대 꽃밭
오전 10시 무렵 도착한 첨성대. 뜻밖에도 사람이 적지 않다. 한국인도 많지만 외국인도 상당수다. 경주시를 여러 번 여행했지만 외국인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처음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더운 날씨 탓에 대부분 우산이나 양산을 들고 걷는다.
첨성대 바로 앞인 천마총노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첨성대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화사한 배롱나무꽃, 즉 자미화가 관광객의 눈을 현혹한다. 첨성대 주변에 화사하게 핀 것은 물론이거니와 별개의 배롱나무 화원도 조성돼 있다. 화원에서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휴대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모양이 매우 특이한 배롱나무는 충직, 기개, 부귀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한다. 늘 품위가 있고 신령스럽게 느껴진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주홍색 자미화는 한 송이 한 송이만 보면 아름답지 않지만, 여러 꽃송이가 모이면 마치 선계에서나 피어나는 꽃처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자미화를 지척에 둔 첨성대는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이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 보인다.
첨성대 오른쪽에 자리를 잡은 신라시대의 숲 계림으로 들어간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얽힌 계림은 가을에는 알록달록한 단풍나무가 아름다운 곳이지만 8월에는 보라색 맥문동이 화사한 곳이다.
수백 년 묵은 나무가 즐비한 계림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늘 아래에 설치된 작은 벤치에 앉는다. 주변이 뚫린 덕에 곳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푸른 나뭇잎이 하늘을 가리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면 파란 잎 사이로 솟아난 보라색 맥문동이 숲을 덮는다. 규모가 커서 경주시민의 휴게소 역할을 하는 황성공원의 맥문동도 유명하다는데 기자에게는 아담한 계림에서 ‘나 홀로’ 즐기는 맥문동이 더 아름답다.
계림 바로 앞에는 꽤 큰 규모로 백일홍 정원이 조성돼 있다. 뜨거운 햇살을 받아서인지 꽤 선명하고 싱싱하게 잘 자란 백일홍은 태양만큼이나 자극적인 미소로 관람객을 유혹한다. 백일홍 정원 맞은편에는 천수국, 대항화, 홍접초, 수국, 꽃범의꼬리, 자주꿩의비름 같은 다양한 꽃으로 이뤄진 넓은 꽃밭이 펼쳐진다. 그 뒤로는 파란 잎에 노란 꽃을 꼿꼿이 치켜세운 해바라기 군락지가 조성돼 있다.
온갖 꽃이 만발한 장면을 첨성대는 말없이 바라본다. 수백 년간 밤하늘의 별만 보던 그로서는 상전벽해 같은 풍경일지도 모른다. 기자도 첨성대 앞에 서서 자미화는 물론 온 세상을 화사하게 물들인 ‘꽃의 향연’을 묵묵히 지켜본다. 첨성대, 해바라기 그리고 각양각색의 꽃으로 이뤄진 풍경은 ‘이곳이 내가 알던 첨성대인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해바라기 군락지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실오라기 같기도 하고 잡초 같기도 한 희끄무레한 풀이 보인다. 가을이면 첨성대 일대를 분홍빛으로 짙게 물들일 핑크뮬리다. 가을에 이곳 풍경은 어떠할지 궁금해하면서 경주시의 명물인 찰보리빵과 경주빵을 구입해 자동차로 돌아간다.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은 것은 8년 만이다. 오랜만에 찾은 이곳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수년 전 방문했던 그리스 아테네의 국립고고학박물관 분위기가 났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8년 전에는 단순히 유물을 나열한 ‘전시실’이었다면 지금은 틀에서 벗어난 전시에다 보는 재미를 더한 그야말로 ‘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든다.
신라역사관에서는 황금으로 만들었다는 신라의 화려한 세공품이 눈을 번쩍 뜨게 만든다.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금관, 관식, 모관은 아테네에서 본 고대 그리스의 장식품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 안팎을 오가는 인파를 지켜보는 로비의 ‘십이지상 원숭이’는 관람객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하다. 보호장치에 둘러싸여 벽에 걸린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의 미소’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기 전시품이다.
신라미술관에서 발견한 불교 미술 조각상도 환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금강역사, 사천왕, 팔부중 등 다양한 신장상의 강력한 표정과 역동적 자세는 잊지 못할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불교 조각 3실’에서 만난 약사여래는 무더위와 일상에 지친 관람객에게 위로와 안식을 준다.
출구 쪽에 위치한 영상관에는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 성덕대왕 신종 등 신라시대 걸작을 소개하는 화려한 영상이 이어진다. 외계인이 나타나는가 하면 우주전쟁 같은 화면이 등장해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어올린다. 물론 어른이 보기에도 꽤 재미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