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읽기] 나는 남편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즐거운 어른 / 이옥선
“나는 남편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밤중에 빙글빙글 도는 우주로 통할 것 같은 부산항대교를 지나면서 ‘나는 자유다!’라고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마음만 그렇게 했다.” 젊은 여성 작가의 소설이 아니다.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온 76세의 여성이 쓴 에세이다. ‘할매 에세이스트’의 탄생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부산은 이런 분들이 곧잘 나오는 신비한 지역이다.
에라이 이노무 자슥들! 장 자크 루소, 톨스토이, 헤밍웨이, 버트란트 러셀, 마르크스, 샤르트르, 아인슈타인, 조지 오웰, 놈 촘스키까지 된통 욕을 먹는다. 툭하면 바람을 피우고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작자들이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유명한 사람도 잘못했다고 나무랄 수 있단다. 할매는 추석도 각자 집에서 알아서 지내자고 역설한다. 살면서 별의별 경우를 다 봐서 그렇다. 집안의 여자가 암에 걸려 입원하면 제사 지낼 엄두도 못 내고, 부인 죽고 며느리 없는 집안은 부인 제사조차 못 지낸다. 전통이나 가풍은 남의 집 딸들을 데려다가 자기네 조상 섬긴 것밖에 안 된다는 폭로에 속이 다 후련해진다.
주부로만 생활한 분이 어떻게 이런 재미나고 유려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경험과 독서라는 양 날개의 힘 덕분인 것 같다. 저자는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인생수업>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삶의 교사’라고 했던 말을 인용한다. 삶은 기회이며, 아름다움이고, 놀이이므로, 그것을 붙잡고, 감상하고, 누리라고 역설한다. 문명에 대한 할매의 경고는 매섭게 이어진다. 이 문명은 지나치게 남성 편향적인 세상을 만들었고, 이제 그 몰락의 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새롭게 도래할 문명이 두려우면서도 기대가 된다. 이옥선 지음/이야기장수/248쪽/1만 68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