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어서원이 가슴에 새긴 ‘부산을 기억하는 법’
■부산에 삽니다 / 백년어서원
‘개똥철학’ 시리즈로 11번째
정신·장소성 일깨운 부산말
오감으로 바다 느껴 보기도
처음으로 부산을 꽤 오래 떠나 있다 돌아온 참이었다. 부산역에서 마주친 바람은 확실히 달랐다. 바람에 실린 바다 냄새에 내가 부산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고명자 시인은 아직 부산을 잘 모른다면서도 부산의 바다를 오감으로 기가 막히게 설명한다. 다가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는 청각의 바다다. 해초를 씹었을 때 입안에는 미각의 바다가 퍼진다. 바다에 몸을 던져 보거나, 폭풍의 바다에서 사투하며 느끼는 촉각의 바다도 있다.
내가 느꼈던 것은 후각의 바다였다. 온도가 조금 오르면 바람에 실려 오는 해초 냄새가 진해진다. 부산은 1월 중순을 기점으로 바다 냄새가 달라진단다. <부산에 삽니다>는 백년어서원이 11번째 내놓은 ‘개똥철학’ 시리즈로 올해의 주제는 ‘부산’이다. 자기 몸 안에서 빛을 만들어 내는 개똥벌레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에너지에 대한 은유로 지어진 이름이다. 맨앞 장 윤국희 씨의 글 ‘역사는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를 읽으면서부터 이 책이 허투루 만들어진 게 아님을 깨달았다.
윤 씨의 글은 영화 ‘서울의 봄’이 좀 아쉬웠다고 시작한다. 역사적으로 서울의 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부마항쟁이 있어서 가능했는데 영화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다. 5·18 민주화운동에 묻혀 버린 것이다. 윤 씨는 부마항쟁 구술 녹음 파일을 풀며 만난 피해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소개했다. 민주화 운동의 전환점이 된 부마항쟁을 부산시민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이야기는 원양어선의 입출항이었던 부산 남항이다. 김태수 시인은 원양어업 전성기였던 1970년대 후반 남항이 흥청거리면 남포동이 들썩거렸고 부산에는 생동감이 넘쳤다고 소개한다. 남포동 마담들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꽃다발을 들고 배에 올라 환영했다니 ‘아! 옛날이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재조명되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에 비해 원양어선 선원들에 대한 기억은 너무 박한 게 사실이다.
셋방 사는 집 아이가 주인집 흑백 텔레비전을 훔쳐보던 일이 나만의 아픔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도 반갑다. 김수우 시인은 어느 날 주인집 방문이 활짝 열렸을 때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같이’의 가치가 평생 따라가는 그림자가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송도해수욕장에 나가 조기청소를 했던 일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초등학생들을 아침부터 노역을 시킨 데 대해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 60년대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한 달에 한 번 조기청소하는 날이 있었다는 글을 만났다. 이 글을 쓴 강미애 씨가 “우리는 쇠똥구리처럼 힘을 모아 한 세계를 굴렸다. 오래전 새벽길을 함께 쓸던 친구들을 떠오른다”라고 표현하니 감동이 밀려온다.
이 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23명의 저자 대부분이 깊이가 있게 너무 글을 잘써서 놀랐다. 백년어서원에서 나이 들고 함께 젊어간다는 한 저자의 소개글에서 그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백년어서원’은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힘을 기르고 우리 삶과 공동체를 고민하고 있단다.
‘인자 문 끼라 봐라!/바까튼 눈부신 햇살/침잠의 시계추는 멈차뿐지 오래/침묵은 니 얼굴이 아이야//생각해 봐라!/이 대낮의 햇살과/이 대지의 자유와/이 정직한 평화는/얼매나 값비싼 대가였는지//벌씨로 이자문나?’ 부산작가회의가 낸 시집 <인자 문 끼라 봐라>의 표제가 된 김점미 시인의 ‘다시 촛불’이다. 부산말로 시를 썼기에 그대로 가슴팍에 꽂힌다. 철학자 이수경 씨는 “주변어인 지역어는 그 현장에서 살아서 장소성을 회복시키고 정신을 일깨운다. 부산의 정신을 넘어 온 나라의 정신을 일깨운다”라고 말한다.
부산살이가 모든 게 좋기만 했을 리가 없다.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해서 떠나고 싶었던 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나를 성장시킨 부산, 떠나지 못했던 부산,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부산은 곧 나의 부모님’이란 문장이 뭉클하다. 백년어서원 지음/신생/280쪽/1만 50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