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평등·다양성 ‘3박자’ 세계 최고 공연예술 축제 ‘명성’ [세계 공연예술 도시를 가다]
② 영국 에든버러: 에든버러 페스티벌
시행착오·오랜 시간 걸려 만든 축제
작품의 질, 다채로운 콘텐츠 큰 호응
“주민 없는 지역 축제는 의미 없다”
지역 연계 프로그램 연중 진행
누구나 공연하고 볼 수 있는 페스티벌
3만 회 공연 프린지… 도시가 극장
줄어드는 문화 관련 예산은 고민
지난 6월 프랑스 몽펠리에 방문에 이어 한 달 보름 만인 8월 중순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행 비행기를 타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사람으로 치면, 이제 막 돌이 지나 걸음마를 시작하는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 비팜·10월 4~8일)이 벤치마킹하기에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너무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에든버러행을 강행한 데는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 축제 도시라는 명성을 얻은 페스티벌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베이비 비팜’이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특히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EIF)과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이하 프린지)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페스티벌 11개 뭉친 ‘협의체’
에든버러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 ‘에든버러 페스티벌 협의체’의 제임스 맥베이 홍보팀장을 만났다. 그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8월에만 있는 게 아니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세계 최초의 에든버러 과학 축제가 매년 4월에 열리는 것을 비롯해, 에든버러 국제 어린이 축제(5월), 에든버러 국제 영화제(6월), 에든버러 재즈 & 블루스 축제(7월), 프린지(8월), EIF(8월), 로열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8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북 페스티벌(8월), 에든버러 아트 페스티벌(8월), 스코틀랜드 국제 스토리텔링 페스티벌(10월), 에든버러 호그머네이(새해맞이 축제) 등 11개 페스티벌이 연중 펼쳐진다고 설명했다. 2007년 만들어진 협의체는 협업을 통해 공통의 펀드를 만드는 등 2007년부터 뭉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고의 축제 도시 명성은 그렇게 생겨난 듯했다. 특히 제임스는 “영국 정부가 (축제의 도시로) 에든버러를 선택한 이유가 축제는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 컸다”고 말했다. 런던 다음으로 에든버러 방문객이 많은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해리포터>의 작가 J.K. 롤링이 에든버러에서 가난한 예술가로 살면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영국예술위원회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고 보충 설명했다.
공연예술 축제가 성공하려면 작품의 질 못지않게 다채로운 프로그래밍이 중요하다는 말도 강조했다. 어셔홀(2300석 규모)에서 관람한 말러 교향곡 5번 빈백(beanbag) 콘서트는 낮이었는데도 2층과 합창석까지 꽉 찼다. 1층 스톨(STALL)석을 예매했는데, 바로 눈앞에는 제1 바이올린, 등 뒤로는 금관악기, 오른쪽은 목관악기가 연주하고, 청중들은 무대 위 연주자들 사이에 놓인 빈백에 눕다시피 해서 감상했다. 같은 리허설 연주였지만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그다음 날 페스티벌 극장(1800석 규모)에서 관람한 ‘피가로의 결혼’은 독일 베를린코미셰오페라를 통째로 가져온 경우였다. 현대로 배경을 옮긴 극은 원작에 없는 나이프 살인 등 공포, 스릴러 요소까지 보태 실험이 지나치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지만, 귀족과 하인을 상층과 하층 계급으로 나눈 2층 무대세트와 가수들의 역량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난해 EIF 제11대 예술감독이 된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라 베네데티의 부임으로 음악 프로그래밍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 듯했다.
EIF가 작품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체계’에 대한 언급은 놀라웠다. 에든버러 축제가 오랜 세월 최고 명성을 지켜온 내공이 아닌가 싶었다. 첫째가 예술성, 둘째는 스코틀랜드를 전 세계에 홍보하는 역할, 셋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빌려오거나 가져오는 것, 넷째는 예술적 협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용과 평등, 다양성 추구를 꼽았다.
EIF 재정(코로나 이전 2019년 기준)은 에든버러시(시의회)에서 17%를 부담하고, 정부(부산문화재단 같은 ‘크리에이티브 스코틀랜드’) 지원이 19%, 프로젝트 기금 7%, 티켓 수입 26%, 모금(개인 기부, 기업체 스폰서 포함) 29%, 기타 2%였다. 이렇게 해서 모은 비용은 작품 제작 등 프로덕션(72%), 마케팅(13%), 행정(11%), 기금 모금(4%) 등으로 대부분 충당했다. 지원은 하되 일체 간섭 없는 ‘팔길이 원칙’이 적용된다.
■기회와 포용의 땅, 프린지
EIF에 초청받지 못한 8명의 예술가가 모여서 시작한 프린지는 어느새 EIF를 압도했다는 평가다. 기본적으로 프린지에는 공연 기획자가 없다. 에이전시 모델로서 플랫폼 역할만 한다. 프린지 페스티벌 최고 책임자 쇼나 맥카티는 프린지 페스티벌의 성공 비결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로는 포용, 그리고 평등이다. 누구든지 공연할 수 있고, 누구든지 볼 수 있다. 그 관점이 성공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표현의 자유를 들 수 있겠다”고 말했다.
공연 작품이 많다 보니 기존 공연장으로는 해결이 어려워 도시 전체가 극장으로 변신했다. 교회, 대학교, 놀이터, 공원 등 8월 한 달만 공연장으로 바뀌는 곳이 수두룩하다. 그뿐 아니다. 축제의 거리인 로열 마일을 걷다 보면 자신의 공연을 홍보하기 위해 하이라이트 공연을 선보이는 공연팀과 서커스, 마술, 음악, 살아 있는 조각상 등을 선보이는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이 즐비하다.
EIF와 프린지는 재정 구조가 다르다. 프린지의 경우, 공공 재원은 7%에 불과해 철저한 민간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스 오피스 티켓 수입이 36%로 가장 높은 비중이지만, 새로운 앱을 만드는 등 티켓 오피스 시스템 개선에 24%를 지출했다. 앱도 단순 예약에 그치지 않고, 수천 개의 공연을 위치 기반으로 알려준다거나 랜덤 방식으로 추천해 프린지의 기본 평등 정신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올해의 경우 대략 3000여 개 작품이 300여 장소에서 공연했다. 공연 횟수로는 3만 회 정도 된다. 관객은 350만 명으로 추산된다.
프린지 빅 4 공연장 중 하나인 어셈블리만 하더라도 24개의 공연장에 2000여 개의 공연이 도전하고, 그중 200여 작품이 올라간다. 나머지 공연장인 플레즌스, 길디드 벌룬, 언더밸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셈블리 프린지 페스티벌(예술감독 윌리엄 버뎃-쿠츠) 파트너십으로 2015년부터 ‘코리안 시즌’을 이끄는 글로벌 문화기업 에이투비즈의 예술감독 엔젤라 권을 만났다. 올해도 ‘아리아라리’, ‘유앤잇’, ‘침묵’, ‘흑백 다방’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4개 공연팀을 선보여 호평을 끌어냈다. 특히 어셈블리홀 메인홀에서 한 달간 공연한 뮤지컬 퍼포먼스 ‘아리아라리(영어명 ARI)’는 2만여 명이 넘는 관람객을 동원하고 막을 내렸다. 5개의 현지 언론으로부터 최고 평점인 별점 5개를 받았다. 어셈블리 체크 포인트 극장에서 한 달간 장기 공연한 창작 뮤지컬 ‘유앤잇’도 ‘PICK of the FRINGE’에서 올해의 공연으로 선정되는 등 좋은 평가를 얻었다.
■재정 고민 우리와 다르지 않아
공연예술계 사정은 영국이라고 나은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드는 문화 관련 예산에 어떻게 하면 기부금을 포함한 많은 재정을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했다. 최근 눈에 띄는 경향으로는 50%가 넘던 기업 협찬이 줄고, 개인 기부가 늘어나는 점이다.
티켓 구입은 지역에서 가장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의 경우엔 65%가 해외 관객이고 나머지가 지역 주민이다. 지역 주민이 가지 않으면 지역 페스티벌 의미가 없다는 연장선에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커뮤니티 프로그램은 연중 진행한다. 단순 예술가 파견이 아니라(공급자 중심이 아니라) 학교 커리큘럼에 맞춰서 한다. 과학 축제와 예술 페스티벌은 학교에서 과학·예술교육을 병행한다.
에든버러 시민 72%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이 도시를 좋게 만든다고 답변했다. 에든버러는 인구 작은 도시여서 실제 주민은 불편할 수 있다. 최근엔 오버투어리즘 문제가 생겨났다. 에든버러시의 경우, 관광세(5%)를 검토 중이다. 이르면 2026년 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뮤지컬 ‘유앤잇’ 이응규 프로듀서는 “이번 에든버러 프로젝트를 통해 ‘유앤잇’의 영미권 시장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게 가장 큰 성과”라고 말하면서도 “뮤지컬의 본고장인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에서 본공연을 올릴 거면 상당한 재정 부담이 따르는 만큼 해외 진출 공연 우수작에 대한 지원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아비뇽 페스티벌에 이어 올해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다녀온 박철중 시의원은 “70, 80년 된 축제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면서 “부산도 (한국영화아카데미처럼) 연극 아카데미나 춤 안무센터 같은 창작의 터전을 구축하는 장기적인 비전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지속 가능한 예산으로 공연예술 작품 유통을 위한 페스티벌 개최와 공연 생태계 구축의 쌍두마차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젤라 권은 부산시 관계자 등을 만난 가운데 “에든버러, 호주 애들레이드, 프랑스 아비뇽으로 대표되는 세계 3대 공연예술 축제가 있지만, 1등과 격차는 큰 편”이라면서도 “아시아를 대표하는 공연예술축제가 없다는 점은 늘 아쉬워 부산(해운대)을 강력한 후보지로 꼽은 적이 있고 실제로도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일을 추진하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부산에서도 마음만 먹는다면 강원도 정선이 ‘아리아라리’를 만든 것처럼 부산만의 콘텐츠를 못 만들 게 뭐 있겠냐”며 “중장기적인 지원 계획과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스코틀랜드 영국문화원의 이사벨 멘데스는 “비팜이 축제형 마켓을 지향한다지만 ‘마켓’이란 이름이 타이틀이 된 이상 균형을 맞춰야 할 것이며, 이제 막 페스티벌이 생긴 거니까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차근차근 헤쳐나가길 바란다”는 말로 격려했다.
최윤진 부산문화재단 비팜추진단장은 “비팜도 우리의 자랑, 자갈치시장과 똑같다고 본다. 자갈치시장이 부산의 고유 브랜드가 된 것처럼, 좋은 공연 작품을 파는 것이 부산의 매력을 파는 것으로 이어진다. 갈 길은 멀지만, 좋은 작품이 거래되고 다시 찾고 싶은 비팜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공동기획 : 부산일보, 부산문화재단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