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겨진 종이, 새로운 미학이 되다
30일까지 데이트 갤러리서
김춘환 ‘심연의 진동’ 전시
패널에 종이 붙이고 절단 반복
잘린 단면, 회화로 연상되기도
“같은 재료로 작업해도 정말 완전히 다르게 나올 수 있군요. 그래서 작가,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거겠죠. 새롭고 놀랍고 재미있습니다.”
데이트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김춘환 작가의 작품을 보고 처음 했던 말이다. 미술판에서 김 작가의 전시를 몇 번이나 추천받았다. 색다르고 흔히 볼 수 없는 전시이니 놓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늦은 여름휴가에 줄줄이 이어진 아트페어, 명절 특집까지 다른 기사를 챙기느라 이 전시를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득 생각나서 ‘김춘환-심연의 진동(Undercurrent)’ 전시 초청장을 열었다. 전시가 30일에 끝난다. 갤러리로 바로 달려가 전시를 봤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 좋은 전시를 소개하지도 못했겠다 싶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김춘환 작가는 서울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에서 조형학과 석사를 끝낸 후 이후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파리 RX갤러리와 브뤼셀 Arthus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전업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김춘환 작가는 30여 년 전 프랑스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작업 방식을 고수했다. 주변에서 모은 인쇄물과 잡지 등을 뜯고 구겨서 나무로 만든 패널 위에 빽빽이 붙인 후 칼로 절단한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오리거나 특수한 이미지의 부분만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빽빽하게 붙은 잡지를 잘린 단면, 종이가 붙어 만들어진 주름 등으로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낸다.
종이의 이미지는 상호 간섭과 뒤섞임을 통해 상쇄되고 인쇄물이 본래 가진 의미도 사라진다. 물감을 사용하지 않지만, 작가에게 종이가 물감이듯 종이를 붙이며 만들어진 선은 붓질이 되어 화면의 시각적 자율성과 다양성을 드러낸다.
작가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언뜻 물감이 두껍게 칠해진 추상처럼 보였다. 실제로 물감으로 색이 잘 조율된 화면이라면 작가의 취향이 강하게 스민 몇 가지 색이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춘환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톤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수의 색이 보인다. 작가가 수집한 인쇄물에 있는 자체의 색들이 가까이 볼수록 더 상세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의 작품은 색보다 고밀도로 집적된 인쇄물이 깎이며 노출된 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역동적인 질감은 마치 종이로 가공되기 전 자연 그대로의 야생성을 표현하는 듯하다.
블랙 계열의 작품은 모든 것이 태어났던 어둠(흙이나 우주) 속으로 돌아가는 단계를 떠올리게 되고, 피부 빛을 연상시키는 색감은 살갗 아래의 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는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에 모든 것을 떠맡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이 덩어리들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이러한 우연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화면의 시각적 자율성과 다양성을 부여한다”라고 설명한다.
이 같은 작가의 작업 방식 때문에 작가의 작품은 똑같은 것이 탄생하기 어렵다. 모든 작품은 오직 1개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이를 구기고 접고 뭉치고 잘라서 작품을 완성했지만, 종이라는 물성은 그대로 남겼다. 그러나 처음 작품을 볼 때 느꼈던 것처럼 완전히 다른 영역인 회화처럼 보이게 했다는 점은 작가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 작가의 파리 작업실과 한국 인천 작업실에는 각각 4톤의 종이가 준비돼 있다고 한다. 큰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똑같은 광고지, 똑같은 인쇄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처럼 엄청난 양을 미리 확보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4톤의 종이가 어떤 작품으로 탄생할지 미리 궁금해졌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