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베스트셀러에 '박제'된 뒷골목 여성들의 삶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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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번트가든의 여자들 / 핼리 루벤홀드

25만 부 팔린 '매춘부 리스트' 관한 책
명단 속 여성들의 고난한 삶을 조명
리스트 구매한 남성들 되레 '리스트'화

<코번트가든의 여자들> 표지. <코번트가든의 여자들> 표지.

오늘날 ‘코번트가든’은 영국 런던의 주요 관광지다. 잡화점이 늘어선 아치형 지붕 아래로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거리 여기저기에서 예술가들이 버스킹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곳이다. 영화 ‘노팅힐’에서 묘사되는 노팅힐과 비슷한, 따뜻한 분위기. 그러나 300년 전의 코번트가든은 전혀 달랐다. 1700년대 이곳은 잡화점 대신 유곽 겸 술집들이 즐비한 ‘밤의 도시’ 환락가였다.

1757년 이곳에서는 역사적으로 손꼽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탄생한다. 빈털터리 시인과 술집 웨이터, 그리고 한 성매매여성이 의기투합해 ‘해리스의 코번트가든 여자 리스트’(이하 해리스 리스트)라는 작은 책자를 출간했다. 런던 성매매여성들의 이름과 전공(?)을 상세하게 기술한 이 저질 출판물(한마디로 ‘성매매 가이드북’이다)은 약 25만 부를 팔아 치우면서 18세기의 가장 수치스럽고도 성공적인 출판물 중 하나가 됐다.

<코번트가든의 여자들>은 해당 리스트에 관한 책이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특정 작품(여기서는 영화가 아닌 성매매여성 리스트)에 대한 메이킹필름 정도 되겠다. 책의 주요 등장인물은 앞서도 말한 리스트를 만든 세 사람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세 사람이지만 이들의 굴곡진 삶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정작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이들이 아님을 깨닫는다.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해리스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여자들, 바로 성매매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가혹한 세상에 맞서 어떻게든 삶을 일궈야 했던 보통 사람들이다.

저자는 섣부른 도덕적 비난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성매매여성 리스트를 만든 세 사람이나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 그 누구도 단순히 범죄자나 욕망에 눈이 먼 사람으로만 취급받지 않는다. 책은 그저 주어진 순간을 버티며 더 나은 삶을 꿈꿨던 사람들 혹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결국엔 가라앉고 만 보통 사람들의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뒷이야기를 조명한다.

도덕적으로 부끄럽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리스트’에 오른 거리의 여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리스트를 구매한(앞서도 말했지만 25만 부나 팔렸다) 고객들이다. 책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이른바 ‘신사’라 불리던 많은 남성들의 재킷 안주머니에 이 리스트가 필수품처럼 꽃혀 있었다고 한다. 특히 당대의 정치인들이나 유력 인사들은 당시 성매매업의 주요 고객층이기도 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그런 남성들의 목록을 따로 마련해 첨부한다. 이른바 ‘해리스 리스트’가 아닌 ‘루벤홀드(저자의 이름) 리스트’다. 리스트에 오른 이름에는 ‘백작’이니 ‘남작’이니 ‘의원’이니 하는 명칭이 붙은 사람들 투성이다. 시대가 기억하고 기록으로 ‘박제’해야 할 부끄러운 이름은 나약한 성매매여성 리스트가 아니라, 고약한 고객의 리스트다.

<코번트가든의 여자들>은 우리나라에서만 늦게 번역되었을 뿐, 이미 2005년에 나온 저자의 데뷔작이다. 책은 당시 ‘매춘부의 핸드북’이라는 BBC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다. 저자는 이후에도 표면적 역사보다 그 이면에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천착했다. <코번트가든의 여자들>보다 국내에 먼저 번역된 <더 파이브: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2019년 영어권 논픽션 부문 최고 권위의 영국 베일리 기퍼드상을 수상한 작품이니, 함께 권해본다. 핼리 루벤홀드 지음/정지영 옮김/북트리거/456쪽/2만 2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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