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귀성과 차례는 종교적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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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유달리 더웠던 올해 추석 명절을 보내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더는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집안에서도 선친의 묘소를 국립영천호국원으로 옮기자는 말이 나왔다. 벌초에 따라갔던 식구들이 현장에서 진드기에게 물렸고 그 진드기들이 집까지 따라온 게 화근이었다. 진드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충제를 사서 몸과 옷, 가방은 물론이고 차 안까지 모두 뿌렸는데도 진드기는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해충 퇴치 전문 회사에 의뢰해 온 집안을 소독하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그런데도 아직 집안에 진드기가 보인다고 한다. 위험해서 더는 벌초하러 갈 수 없으니, 이참에 이장을 하자는 것이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말벌, 진드기, 뱀이 확실히 늘어났고,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산은 나무와 풀이 무성해져 과거보다 훨씬 위험한 공간이 되었다. 실제로 벌초나 성묘 때 벌에 쏘이거나 진드기에게 물려 죽는 경우도 있다.

유달리 덥고 힘들었던 올해 추석

차례 등 생략하는 집안 부쩍 늘어

하지만 차례는 차례 이상의 무엇

조상신 부활 관련한 종교적 의례

현대에도 지속되는 이유 살펴야

단순한 관습으로 치부해선 안 돼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는가. 경제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가 왜 명절이면 전국의 도로를 주차장으로 만들면서 성묘와 귀성에 나서는가. 대한민국에서 여자들이 싫다는 일은 다 사라졌는데, 명절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차례는 왜 없어지지 않는가.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해답은 차례 속에 있다. 주부들이 열심히 차례상을 차리면, 제주는 비로소 향을 피우고 술을 붓는다. 차례나 제사에서 처음 쓰는 술은 원래 땅에 부어 조상의 백(魄)을 불러오기 위한 것이다. 종묘 제사에선 실제로 바닥에 구멍을 뚫어 놓고 술을 붓는다. 지금은 아파트나 주택에 바닥을 뚫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향로나 퇴주 그릇에 부을 뿐이다. 향은 당연히 하늘에서 후손을 돌보고 있는 혼(魂)을 모셔 오는 수단이다. 이러한 차례나 제사의 첫 단계를 강신이라고 한다.

강신 다음에는 차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함께 절하여 영신의 의례를 행한다. 지방에는 신위 즉, 신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 바로 조상신이 앉아 계시는 곳이다. 향과 술로 살아 돌아오신 조상께 술과 여러 가지 음식을 대접하고, 끝난 뒤에는 조상신이 내려주신 복을 함께 나누는 음복을 한다. 이것이 차례이고 제사다. 차이가 있다면 차례에서는 술을 한 잔만 올리고, 제사에서는 기본적으로 석 잔을 올린다. 더 많은 술을 올려야 할 경우에만, 첨잔을 행한다. 술과 음식을 먹는 일이야말로 살아있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또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차례와 제사의 본질은 우리들의 정성으로 혼백이 결합해 다시 살아나신 조상신께 정성을 표하는 일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행하는 벌초와 성묘도 차례를 위한 것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된다고 했다. 혼은 우리 정신으로 대표되는 기(氣)이고, 백은 우리 몸으로 대표되는 기이다. 백은 흰 속성을 가진 귀(鬼)라는 뜻의 글자이고, 죽으면 땅에 묻는 시신을 상징한다. 산소는 바로 백의 집이다. 돌아가신 조상의 백이 온전히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혼과 백을 온전히 결합할 수 있다. 동시에 차례를 지내기 위한 종교적 순례이기도 하다.

종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설명 체계이다.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와 같은 서아시아의 종교는 근본 교리가 공통으로 부활 영생이다. 사람은 죽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언젠가 부활해 심판받고 영생의 길로 들어선다. 브라만교, 자이나교, 불교와 같은 남아시아의 종교는 윤회전생을 주장한다. 수레바퀴가 돌 듯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끝이 아닌 셈이다. 불교의 또 한 가지 교리는 대승불교가 설하는 극락왕생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서방정토로 가기 위한 치명적인 주문이다. 도교는 명약관화하게 불로장생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유교는 무엇일까. ‘초혼복백 재생’, 혼을 부르고 백을 소환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줄이면 초혼재생이다. 혼과 백을 신으로 재생시키는 의례가 바로 차례와 제사의 강신이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조선 멸망 후 100년이 훌쩍 지났어도 아직 계속되고 있는 차례와 제사, 벌초와 성묘, 귀성과 역귀성과 같은 행위를 종교적 열정이 아니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사와 차례를 차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조상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들의 행위가 종교적 의례라고 한다면 마음이 석연해지고 숙연해지지 않는가. 이슬람교의 메카 순례 못잖은 인구 대이동이 일어나는 현상을 그저 미풍양속이나 관습으로 치부하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우리를 모르면 누가 우리를 알아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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