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관 해난 참사, 대마도만 기억해서야…
27일 제8회 문위행 추도제
한국전망대 추도비 앞 열려
오륙도 93명 희생도 새겨야
“문위행(問慰行) 외교사절 임무 중 해난을 당하시어 불귀의 혼이 된 선위들께서는 부디 향음하시고, 한·일 양국이 더욱 평화롭고 번영 발전하도록 보살펴주시옵소서.” 27일 일본 쓰시마시 히타카츠 한국전망대 조선국역관사순난비(朝鮮國譯官使殉亂碑) 앞에서는 특별한 제사가 열려 대마도를 찾은 많은 한국 관광객들의 눈길을 모았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은 문위행 외교사절 순국 추도제였다. 이날 행사에는 추도제 주최 측인 부산초량왜관연구회를 비롯해 부산민학회, 부산남구문화관광해설사회,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대마도에 자리 잡은 한국 사찰 황룡사, 쓰시마시 관계자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안타깝게도 ‘문위행’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 정부가 에도의 막부 쇼군에게 보내는 사절이 통신사, 쓰시마 번주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이 문위행이다. 문위행은 1632~1860년 모두 54회나 파견해 통신사 12회보다 훨씬 잦았다. 평균 4~5년에 한 번씩 파견된 문위행은 20~30년 주기의 통신사에 비해 양국 현안을 해결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다. 문위행은 1811년(순조 11년) 통신사가 단절된 이후에도 계속 파견되어 양국 외교를 지속했다. 문위행은 왜학 역관을 우두머리로 한 91명으로 규정되었고, 대마도 체류일은 평균 80일이었다.
그런데 문위행 도중에 두 차례의 큰 해난 사고가 일어났다. 1703년(숙종 29년) 23번째 문위행 때 부산을 떠나 대마도 와니우라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강풍으로 고위 역관인 정사 한천석을 비록한 조선 측 108명과 쓰시마 측 4명이 모두 바다에서 순사한다. 이에 따라 쓰시마시는 1995년 와니우라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히다카츠 한국전망대에 당시의 비극적 사건을 애도하는 조선국역관사순란비를 세운 것이다. 쓰시마시는 400주년이 되던 2003년에는 희생된 112명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추가로 설치했다. 이날 참석한 쓰시마시 관계자는 “보시다시피 한국전망대를 깔끔하게 재단장했기에 더 많은 한국 관광객이 올 것이라고 믿고, 또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번째 사고는 1766년(영조 42년) 39번째 문위행 때 발생했다. 부산진을 출발해 오륙도를 얼마 지나지 않아 강풍에 103명을 태운 배가 파손되면서 10명만 구조된 채 정사 현태익을 비롯한 93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고가 나자 영조가 “40여 년 왕을 하면서 이렇게 큰일을 당하는 것은 처음이다. 해변에 단을 설치해 외로운 넋을 위로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비석 하나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부산초량왜관연구회는 2016년부터 대마도를 찾아 추도제를 지내왔다. 코로나19 사태로 힘들었던 2021년에는 부산 남구 오륙도스카이워크 광장에서 제5회 추도제를 치렀다. 부산초량왜관연구회 강석환 회장은 “부산은 조선 시대에도 무역의 중심지이자 나름대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으로 국제교류의 도시였다. 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이 바로 역관들이다. 이들의 1703년 해난 사고에 대해서는 대마도에 추모비가 있는데, 1766년 오륙도 사고에 대해서는 정작 우리가 기억하지 않아 아쉽다”라고 말했다. 부산초량왜관연구회는 추모비 건립을 위해 자체적으로 500만 원가량을 모금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한 상태다. 추모비가 만들어지면 역사문화도시 부산을 알리는 관광 콘텐츠로서의 활용도 기대된다.
한편 이번 추도제 참가 일행의 1박2일 일정 중 마지막 코스는 지난달 대마도에 문을 연 한국 사찰 황룡사였다. 황룡사 주지 보혜 스님은 “내년 추도제 때부터 헌다제와 음악 공연을 더하는 등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대마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