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가루 그림에 영겁의 시간을 담다
이기성 작가 개인전 ‘더 어비스’
내달 3일까지 알앤씨 갤러리
쇳가루 재료로 추상회화 선봬
생성·소멸의 자연 이치를 표현
저 멀리 갈색의 굵은 선들이 춤을 춘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재료의 묵직함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직 작가만 사용하는 독특한 재료와 손놀림은 여타 수많은 작품과 확실한 차별점을 만든다. 부산 해운대구 알앤씨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이기성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느낌이다.
11월 3일까지 열리는 이기성 작가의 개인전 ‘더 어비스(The Abyss:심연)’는 작가가 2019년부터 이어오는 ‘Kalpa(겁)’ 시리즈의 연장선이다. ‘겁(刧)’은 산스크리트어로 시간의 단위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뜻하는 개념이다. 작가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함축하는 쇳가루를 통해 영겁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결국 무(無)로 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을 표현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맙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처럼 물리적 공간의 모든 것은 변화합니다. 시대마다 세계를 보는 관점은 바뀝니다. 강남의 도덕이 북방초원에 갔을 때 그것은 속박이 되며, 유목민의 도덕이 강남에 왔을 때 야만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그림은 모든 것이 변화하여 상쇄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자의 깨달음 같은 이야기가 이 작가의 입에서 술술 나온다. 작가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시간의 지배 속에 놓이는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결국 소멸한다. 이 메시지를 잘 나타내는 재료로 쇳가루를 선택한 것이다.
작가는 쇳가루를 손이나 나무토막을 이용해 캔버스에 바른다. 흔히 회화 도구로 쓰는 붓이나 나이프는 사용하지 않는다. 쇳가루는 서서히 산화가 진행되며 얼룩이 은은하게 번져 나간다.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작가는 고착액을 부어 산소를 완전히 차단해 말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미술판에서 쇳가루를 사용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다루기가 녹록지 않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식 과정까지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면 재료에 대해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지금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지 짐작이 된다. 고착액과 산화 횟수가 많을수록 표면 질감은 더 거칠어진다.
쇳가루와 여백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경계 지점은 갈변 현상때문에 생겼다. 코팅하지 않은 생지에 고착액을 뿌리면 캔버스 표면에 스며들며 생겨난 효과다.
쇳가루 작품에는 작가가 의도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작업하는 날의 온도, 습도에 따라 산화 효과가 다르고 부식 상태도 다르다. 작가가 작품의 색과 질감을 제어할 수 없고 모든 작품이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는 우연히 드러나는 효과를 즐긴다고 답했다.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며 우연성을 수용할 수 있게 됐다. 도시 외곽, 조용한 작업실에서 매일 생활하며 자연의 이치를 머리와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원래 저는 치밀하게 모든 과정을 계산하고 의도하는 작가였습니다. 그런데 쇳가루를 이용한 작업을 하며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결국 자연을 따르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얻는 효과를 함께 하니 더 깊고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 면으로만 구성된 작품은 단순해 보이지만, 오히려 해석의 여지가 많은 추상 회화이다. 획 하나만 봐도 대가의 필치를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선에선 생명력이 넘치고 작가 정신이 오롯이 살아 있다. 암적색의 쇳가루는 단단한 무게감도 느껴진다. 조각으로 미술을 시작한 작가의 장점이기도 하다. 버려진 악기들을 수집해 쇳가루를 분사하고 산화시킨 조각을 선보였고, 지금의 겁 연작 바탕이 되었다.
이 작가는 지난 해 프랑스 파리에 본점을 두고 세계 주요 도시에 지점을 가진 국제적인 갤러리 오페라와 전속 계약하며 인기 급상승 중이다. 오페라 갤러리는 세계 최고의 아트페어를 비롯해 주요 도시에서 이 작가 전시를 열며 이 작가를 세계적인 작가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미술계 슈퍼 컬렉터로 알려진 오페라 갤러리 그룹 질 디앙 회장이 직접 이 작가의 작품을 보고 이 작가와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오페라 갤러리와 계약하며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작업실에 가고 오후 4시 산책하고 다시 저녁까지 작업하는 시골 작가일 뿐입니다.” 작가의 소박한 끝인사에 긴 여운이 느껴진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