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했던 예술가 이중섭의 ‘화양연화’
■ 참 좋았더라 / 김탁환
월남해 부산·제주도 떠돌다
전력투구한 통영 시절 조명
“각자의 전성기 생각해 보길…”
‘국민화가’ 이중섭은 과묵했다. 사람들이 많은 데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이중섭은 왜 그랬을까. 그는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나 평양시와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공부하고, 도쿄 유학 후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살다가 월남한다. 1950년 12월 부산에 도착하고 일 년 남짓 서귀포에 머물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후 1953년 통영으로 옮겼다. 평안도 사투리가 심한 이북 사람이 경상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리게 된 것이다.
<참 좋았더라>는 역사소설로 이름이 난 작가 김탁환이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소설이다. 소설을 읽는 진도는 잘 나가지 않는다. 이중섭의 심한 이북 사투리 때문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다. 어머니를 북에, 아내와 자식은 일본에 두고 홀로 된 이중섭이다. 말까지 낯선 타향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실향민이 지닌 원초적인 외로움을 말투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평안남도와 함경남도 출신의 탈북민을 소개받아 소설 속 대화를 하나하나 고친 결과다.
그러고 보니 이중섭이 부산에서 제주도와 통영으로 떠돈 것도 이해가 된다. 부산 사람 입장에서는 소설 속 그 시절 부산에 대한 묘사에도 관심이 간다. ‘가난한 피란민도 숨 쉴 구멍이 많은 항구가 부산이었다. 짧게는 사나흘, 길게는 달포 가까이 떠돌다가도 언제나 부산으로 되돌아오고 또 되돌아왔다. 부산이 날마다 예술로 활활 끓었기에, 이중섭은 버텼다.’ 부산은 본디 그런 곳이었다.
소설은 1953년 11월부터 1954년 6월까지 이중섭의 통영 시절에 초점을 맞춘다. 완전히 새로운, 생명력이 박동하는 이중섭의 소가 나온 시기다. 전선 위의 까마귀, 푸르른 바다 풍경 등 풍경화를 비롯한 많은 작품도 통영 시절에 나왔다. 공예가 유강렬, 화가 유택렬·김용주·최영림·박생광, 시인 김춘수·구상 등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수차례의 전시를 통영에서 열었다. 화가 이중섭의 화양연화 시절이었다.
이중섭의 소는 뚝딱 나온 것이 아니었다. 떨어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소, 교접하는 소, 어미 소에게 도움을 청하는 소, 올려다보다가 별을 발견하고 놀라는 소, 내달리는 소,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뒷걸음질하는 소, 죽은 소까지 오래 지켜본 뒤였다.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 걸, 글로 바꾸문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문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이중섭의 날 선 언어가 날아와 귀에 박힌다. 통영 출신 시인 김춘수는 “토영서 지대로 고독해지셨데예. 소가 바위보다 딴딴해 놀랐심더”라고 이중섭의 소를 본 소감을 털어놓는다. 어림도 없다. 서울말로 어떻게 이 말맛을 제대로 전달한다는 말인가. 이중섭은 프랑스 유학 가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만약 전쟁이 터지지 않아서 예정대로 프랑스 유학을 갔다면 그의 작품 세계와 세계적인 위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쓸 데 없는 상상을 해 본다.
소설에는 이중섭이 그린 그림 30여 점이 실려 있다. 어디서,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상세한 이야기와 함께다. 이중섭의 입으로 직접 듣는 해설이라니…. 맨 뒤쪽 참고문헌 표시에는 도록, 편지, 저서, 논문과 신문기사, 문학 작품이 빼곡하다.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이 필요한지 실감하게 만든다.
통영에 자리 잡은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5년 전에 통영 시절의 이중섭에 대해 써 달라고 의뢰해 나온 결과물이다. 지역 출판사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이중섭의 통영 시절을 보며 우리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는지 생각하게 된다. 이중섭은 39세의 너무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탁환 지음/남해의봄날/312쪽/1만 95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