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여행 잘 떠나기 위해 사랑의 가치 성찰하는 삶 살아야”
29일 17기 부일CEO아카데미
정호승 시인 특강
깊은 사랑의 깨달음 없으면 시 쓸 수 없어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사람의 마음 설산뿐이다’.
29일 제17기 부산일보CEO아카데미 강의가 열린 부산롯데호텔 3층 펄룸. 이날 정호승 시인이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사랑과 고통의 본질을 찾아서’를 주제로 강연했다.
정 시인은 자신의 시 ‘여행’을 낭독하며 그 해법을 제시했다.
“인생은 사람의 마음속 사랑을 찾는 여행과도 같은 것입니다. 단 한 사람, 배우자의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인간은 결국 돈의 힘이 아닌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속 사랑을 찾아서 인생이라는 여행을 해오는 것’이라는 그는 마음속 사랑을 찾아 여행하다가 삶의 여행이 끝나면 죽음이라는 여행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는 “죽음이라는 여행을 잘 떠나기 위해선 삶의 여행을 잘해야 한다. 삶이라는 여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사는 우리들은 돈의 가치를 최우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정 시인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사랑’과 ‘고통’을 꼽았다.
그는 “사랑은 고통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고통이 시작된다”며 “사랑하지 않는 인생이라면 고통도 없을 것이나 인생에 사랑과 고통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가 강조한 것은 ‘고통’.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고통을 많이 받듯 사랑 안의 고통이 있다는 정 시인은 사랑이 없는 곳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려고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 박완서 소설가가 생전에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견디는 것’이라는 말을 인용한 정 시인은 “극복하는 것과 견디는 것은 다르다. 참을 줄 모르면 쓰일 데도 없고, 살아갈 수 없다”며 “살아가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강연은 ‘사랑의 무엇으로 완성될까’가 화두가 됐다. “사랑은 우선 모성으로 완성됩니다. 여기에 용서를 더해야 합니다. 용서할 줄 알아야 사랑할 줄 압니다.”
인생이라는 강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서라는 징검다리를 내디뎌야 한다는 것이다.
정 시인은 “수많은 사람이 과거라는 분노, 상처, 증오의 감옥에 갇혀 산다”며 “용서를 선택함으로써 과거를 해방해 현재의 삶을 치유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시 ‘풍경 달다’를 안치환이 부른 노래를 들려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돌아오는 길에/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풍경을 달고 돌아왔다/먼 데서 바람 불어와/풍경소리 들리면/보고 싶은 내 마음이/찾아간 줄 알아라’. 운주사 부부와불의 모습에서 사랑의 영원성, 영속성, 모성의 본질적 가치를 느낀 정 시인은 산사로 돌아와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는 “사랑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고통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사랑 없는 고통은 있어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김수환 추기경), ‘포도가 짓밟히지 않으면 포도주가 될 수 없다’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괴테) 등 명언을 소개했다.
52년째 시를 써온 그가 그동안 발표한 신작 시집 14권 1000여 편 가운데 최고의 시로 꼽는 ‘산산조각’의 마지막 4행이다. ‘삶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뎌낸다’는 그의 철학이 스며드는 구절이다.
정 시인은 또 고려시대 때 지어진 연못에 묻혀있다가 현대에 발굴돼 700년 만에 다시 꽃을 틔운 ‘아라홍련’을 소개하며 고통의 가치를 설명했다. 땅 속에 묻혀 있는 수백 년의 고통 끝에 성취를 거둔 연꽃처럼 행복도 고통이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탐구하는 시간을 가지길 당부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데뷔한 정 시인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다. <슬픔이 기쁨에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와 등단 50년 기념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펴냈다.
강성할 기자 shg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