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물감 주머니를 가지고 있을까요?”
최은희 작가 여섯 번째 개인전
내달 14일까지 프랑스문화원
물감 튜브에서 자란 식물 그려
커다란 벽 하나에 똑같은 크기의 작품 28개가 가로 세로 줄을 정확히 맞춰 걸려있다. 각 작품 안에 그려진 그림은 정확히 액자의 중간에 자리했고 그림의 크기는 모두 같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한 디자인 작품도 아니고 일일이 손으로 직접 그렸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림의 소재와 그려진 형태는 모두 동일하다. 물감 튜브에서 다양한 꽃과 식물이 자라나고 있다. 모두 다른 식물들에 색도 다르지만, 28개의 작품은 하나의 세트라고 말할 정도로 잘 어울린다. 신비하게 느껴지는 이 그림들을 보고 또 보게 된다.
“이 벽에 걸린 28개의 작품은 1개만으로도 작품이 되고 몇 개씩 세트를 구성해도 됩니다. 각 그림마다 가로 세로 위 아래 여백 크기가 모두 동일하게 맞춰 있습니다. 캔버스가 아니라 린넨천 위에 그려 기존 회화의 느낌과 다르죠.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림에 빠져 한참을 보고 있으니 옆에서 누군가 인사를 건넨다. 작품을 그린 최은희 작가이다. 부산예고와 부산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미술교육과 석사, 디자인전문대학원 시각디자인 박사까지 끝낸 작가는 동서대 디자인학부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미술판에선 최 작가에 관해 현장의 작업보다 강단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는 말도 있었다.
정작 최 작가의 마음은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좋았고 누구보다 잘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예고와 대학에서 자신보다 재능이 휠씬 더 뛰어나 보이는 이들을 만났고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미술 분야를 떠나기 싫어 미술 교육으로 석사를 받고, 시각 디자인으로 박사를 받고 대학교 강단에 섰지만 늘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30대 후반, 다시 붓을 잡고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능력에 대한 자책, 좌절감, 다른 사람들과 비교 당하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결국 제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을 떠났죠. 아직 나타나지 않은 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며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어요. 모두 같아 보이는 검정 씨앗에서 나중에 노란색 해바라기, 보랏빛 코스모스, 붉은색 사루비아처럼 다양한 색의 꽃들이 나오는 걸 보며 정말 신기해 했거든요. 당시에는 뿌리가 내리면 물감 주머니가 생기는 거구나 했어요. 지금 하는 작업이 시작이 바로 그 기억입니다.”
최 작가의 그림은 물감 튜브에서 다양한 꽃과 식물이 자라나고 있다. 빨강 물감에서 파랑 꽃이 피기도 하고, 노란 물감에서 빨강 꽃이 피기도 한다. 물감 튜브는 인간의 가능성을 의미하며 어떤 꽃으로 피어날 지 아무도 모른다. 가득 찬 튜브도 있고 많이 사용한 튜브도 있지만, 여전히 남은 물감에선 꽃이 필 수 있다.
캔버스가 아니라 린넨 천에 그림을 그리는 건 특유의 따뜻한 색감이 식물을 감싸는 토양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수를 했을 때 수정이 가능한 캔버스와 달리 수정이 전혀 안 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린넨 천은 작가에게 정말 힘든 작업이었다. 물감을 흡수하는 린넨의 특성도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작은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린넨에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선 아주 얇게 조금씩 물감을 올리고 말리고 또 올려야 하고 작은 것 하나를 실수해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요. 그림을 그리는 지인들이 먼저 말렸어요. 전업 작가로 살기 위해선 이 방식으로 버틸 수가 없다고요.”
최 작가는 꿋꿋이 작업을 이어왔고 이젠 캔버스에 작업하는 속도만큼 탄력이 붙었다. 이번 개인전은 앞으로는 전업 작가로만 살겠다는 발표의 자리이기도 하다. 회화와 더불어 설치 작품도 처음으로 선보였다. 다음으로 나가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최은희 개인전 ‘나를 피워내고, 너를 물들이고’는 11월 14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린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