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쪼대로 아플 자유! 따뜻하기만 한 ‘투병기’는 가라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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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 김도미

30대 암 환자의 삐딱한 ‘질병 극복기’
여성 가족의 희생 강요하는 간병 등
왜곡된 투병 문화에 대한 비판 담아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표지.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표지.

월간 <좋은 생각>을 아시는가. 군대에서 처음 접했던 <좋은 생각>은 삶의 따뜻한 이야기들만 모아, 읽는 이로 하여금 좋은 생각만 하게 만드는 정말 좋은 잡지다. 역경을 이겨낸 소녀 가장 이야기, 몇 년 동안 폐지를 주워 번 돈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쓴 할머니 이야기 등등. 읽는 새 시나브로 내 마음도 따뜻해진다. 내 젊은 시절 전국의 내무반(요즘은 ‘생활관’이라 부른다더라)마다 이 책을 비치한 대한민국 군대의 저의(?)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 잡지 한 권이 장병들 마음 속 불안, 좌절, 불만, 분노의 싹을 자른다. 그러나 세상은 <좋은 생각> 속 이야기들처럼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다. 그런 세상을 마치 아름다운 동화 속 나라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좋은 생각>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런 삐딱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른바 ‘투병기’(鬪病記)라는 장르는 지루하기 그지 없다. 주변인의 사랑에 대한 재확인, 그들의 헌신적인 간병, 삶의 소중함에 대한 뒤늦은 발견…. ‘투병기’의 결론이 병마를 이겨낸 것이든 혹은 반대이든 그 과정 속 ‘질병 극복이라는 서사’의 클리셰는 너무 따뜻하고 아름답다. 마치 <좋은 생각>처럼. 그리고 너무 뻔해서 지루하다.

병마로 시름하는 당사자들에게는 다소 미안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병마로 시름하는 당사자조차 기존의 틀에 박힌 ‘투병기’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새 책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의 저자는 30대 중반 급성골수성백혈병을 진단 받은 환자다. 책은 암 진단 후 ‘완치’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삶의 방식을 전면 수정해야 했던 환자가 정작 본인이 누려야 할 존엄과 자유는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탐구한 기록이다.

저자는 암 판정을 받은 후 환자에 대한 주변으로부터의 배려가 때로는 환자 본인에게 불편한 것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예컨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와 같은 선의의 말들이 환자를 괴롭히는 청순한 무례가 되기도 한다. 암에 걸리면 하지 말라는 게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술을 마셔도 안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되고, 무리해서도 안된다. 세상 모든 사람이 환자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저자는 책을 통해 “지 쪼대로 아플 자유”를 외친다. 배려라는 이름의 간섭보다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저자는 “내 몸에 대한 윤리는 나를 잘 돌보는 데에도 있지만 나를 즐겁게 하는 데에도 있다”고 역설한다. 환자 당사자를 지나치게 통제하고 죄책감을 강요하는 투병 문화에 대한 비판이다.

책은 개인적인 감상뿐 아니라 암 치유 문화라는 현실 이면의 정치적 맥락까지도 들여다본다. 저자는 정성 들여 끓인 ‘닭발곰탕’의 효능을 수많은 암 환자가 철석같이 믿는 배경에는 한국 사회의 유구한 가족주의가 있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족주의는 간병을 비롯한 돌봄 노동을 혈연 가족, 특히 가족의 여성 구성원에게 떠맡기는 제도적 공백의 원인이 된다고 비판한다. 저자의 시선은 딸을 잘 돌보라며 어머니를 닦달하는 이웃들을 향한 원망에서, 복지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돌봄 공동체에 대한 제안으로 확장된다. 한국 사회 구성원 3명 중 1명이 암을 경험한다고 한다. 암 경험자가 많은 만큼, ‘암 극복 서사’도 넘쳐난다. 넘쳐나는 투병 서사 중에 이처럼 조금은 불온(?)한 서사 한 편 정도도 있어도 좋지 않을까.

저자는 여전히 투병 중인 듯하다. 그의 완치를 기원한다. 이 또한 청순한 무례였다면 죄송하다. 김도미 지음/동아시아/360쪽/1만 70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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