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명의 여성 작가, 한국 화단을 빛내다
<그들도 있었다…> 세트 출간
근현대 미술사 동시에 여성사
부산 작가로 전준자 교수 포함
20세기 한국 미술가들을 선별하여 조명한 책에 등장하는 여성 미술가는 극소수다.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작가를 뽑은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00인선집>(1975년 출간)에는 100명의 작가 중 여성은 4명뿐이었고, 이후 증보한 1982년판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120인선집>에도 5명만 포함되었다. 그럼 시대가 흘러 2009년에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기획한 <한국현대미술가100인>에는 상황이 나아졌을까. 그마저 12명밖에 수록되지 않았다.
여성의 재능이 부족해서 여성 작가의 수가 이렇게 적은 것일까. 현대미술 여성연구자들로 구성된 현대미술포럼에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반박하기 위해 2019년부터 대규모 연구를 시작했다. 다양한 출처의 자료 조사를 통해 미술사적으로 의미있는 작업을 보여준 여성 작가를 추리고 또 추려 마침내 105명의 대단한 여성 작가들을 가려 뽑았다. 공교롭게도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를 선정한 책들에서 뽑은 남성 작가의 수와 거의 유사하다. 인구의 반이 여성이듯 근현대를 대표할만한 업적을 가진 미술인의 반도 여성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셈이다.
이 연구 결과가 944쪽이라는 방대한 양의 1,2권 세트 <그들도 있었다-한국 근현대 미술을 만든 여성들>로 출간됐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5년이 걸린 대작업이며 작가를 선정한 후 일일이 자료를 찾아 연구하고,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원고를 집필했다. 도판을 선택해 수록 허가를 받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회화, 조각, 설치 등 미술의 전 영역과 국내외 활동을 아우르는 작가들이 선정되었고, 필진들은 논지를 선명하게 부각하기 위해 여성 작가가 상대적으로 많은 공예 영역을 다루지 않았다. 서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 부분을 첨가해야 완전한 여성 미술사가 재구성될 것이므로, 후속 과제로 남긴다고 밝혔다.
글은 한 작가의 작업 전반을 조명하되 근대기부터 1990년대 말까지의 시기에 중점을 두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을 필두로 근대기 미술의 주목할만한 선구자, 1950년대 중엽 이후 미술 흐름에 동참한 작가들, 이후 후속세대 추상 화가, 조각의 영역을 넓힌 후속 세대, 여성과 여성성을 화두로 삼은 작가, 형상 회화 작가들과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든 작가, 설치와 사진 비디오 등 새로운 매체를 선보인 작가까지 10개의 영역으로 구분해 소개한다.
105명의 작가들 중 부산 작가로선 전준자 부산대 명예교수가 유일하게 포함됐다. 1944년생인 전 교수는 1964년 홍익대 재학 중 국전에 입선했고, 이듬해 특선을 수상하며 일찍부터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1981년 국전 서양화 비구상 부문 추천 작가로 선정되는데, 국전 30년 역사에서 이 분야 최초의 여성 추천 작가였다. 홍익대 미대 1호 연구 조교로 선발되었고 강의까지 맡았지만, 갑작스러운 부친의 작고로 1969년 고향 부산으로 돌아왔다.
1973년 신세계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고, 추상표현주의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재해석한 독특한 조형언어를 보여주었다. 특히 1979년 시작된 축제 연작은 다양하게 변주되며 보편적 인류애를 지향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깊이 배어있다. 1972년부터 11년간 부산여대(현 신라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1983년부터 2009년 퇴임까지 부산대 미술학과 교수로 제자를 양성했다. 1990년부터 1991년까지 프랑스 니스대학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프랑스 체류 당시 연 파리 개인전에 프랑스 미술협회와 평론가들이 대거 몰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 교수를 포함해 <그들도 있었다…> 속 105명의 작가들은 늘 ‘여류’ 화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때로는 가족을 비롯한 사회집단이 작가에게 멍에가 되기도 했다. 여성적인 것을 표현할 때면 진지한 비평 대신 엉뚱한 말이 뒤따르곤 했다.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았고, 창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책은 미술사로서든 여성사로서든 도전의 서사가 가득해 뭉클한 감동이 느껴진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