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캔버스에 담긴 삶의 스펙트럼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전원근 ‘빛이 머문 흔적들’
10일까지 데이트갤러리

전원근 ‘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전원근 ‘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전원근 ‘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전원근 ‘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독일에 작업실을 두고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는 전원근 작가. 유명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열며 전 작가는 어느새 미술판에서 믿고 보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10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데이트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원근 개인전 ‘빛이 머문 흔적들’은 앞서 인기를 끈 동그라미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전 작가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만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팔레트가 아닌 캔버스 표면에서 4가지의 색을 섞어 수많은 다른 색을 만들어 낸다. 한 획의 붓질이 마르기까지 기다리고 색의 변화를 관찰하고 다시 색을 올리다 보니 때론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일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 역시 수십 번이 넘는 붓질과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만든 결과물이다. 역시나 빨강, 노랑, 초록, 파랑 4가지 색을 물처럼 아주 연하게 희석한 후 천 위에 얇게 40~50번 이상 바르고 말리기를 반복한다. 이번 전시 작품을 하나의 과정이 더 들어간다. 바로 중간에 물감을 닦아내는 과정이다. 얇게 바르고 닦아내면서 형체를 거의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겹겹이 쌓아진 색들은 컨버스 밑에서부터 은은하게 우러나와 투명하면서 오묘한 빛깔을 낸다.

전원근 ‘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전원근 ‘무제’. 데이트갤러리 제공

캔버스 옆에 보이는 물감층과 흔적들. 김효정 기자 캔버스 옆에 보이는 물감층과 흔적들. 김효정 기자

처음 작품을 보면 색칠된 그림이 아니라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흰 캔버스인가 싶다. 흰색의 스크린에 빛을 쏘아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흰 캔버스를 천천히 응시하면, 안에 숨겨진 색상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캔버스의 옆을 보면 수십 번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과 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깊은 공간감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수많은 물감층에는 작가의 경험과 조형 언어, 삶이 뒤섞여있다. 빈 캔버스에 담긴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이 전 작가의 작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빈 캔버스 같은 작품이 국제 아트페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