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지우다보면 메시지가 나온다
부산 대표 작가 김응기 화백
12일까지 아리안갤러리 전시
70년대 시작된 메모 시리즈
저항과 소회에 대한 의미 담아
부산 미술상, 송혜수상, 부산시 문화상 등 지역의 굵직한 예술인상을 모두 받으며 부산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 김응기 화백. 70대에 접어들었지만, 김 화백의 예술 세계는 여전히 치열하고 날카로웠다. 부산 해운대구 아리안갤리러에서 열리고 있는 김응기 개인전은 대부분의 전시 작품을 신작으로 채우며 미학적으로 더욱 아름다워졌고 메시지의 힘은 강해졌다.
김 화백은 문자와 이미지의 콜라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고,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품만 보고도 김 작가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미술판에 자신의 흔적을 굳건히 남겼다.
1980년대 부산 형상미술 경향을 주도했던 김 화백은 부산에서 송혜수 선생을 통해 표현주의를 접한다. 1974년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며 개념 미술의 영향이 더해져 1976년 처음으로 콜라주 작업을 시작했다. 제1회 부산현대미술제에 출품한 골판지 상자의 글자를 굵은 선으로 그은 작품이 등장했고, 이듬해 베니어판에 타블로이드 신문지를 붙여 칼로 한 글자씩 긁어내는 방식을 보여주거나, 큰 베니어판에 신문·영문 잡지 등을 콜라주한 후 긁고 지우는 방식을 보여줬다.
1978년 이후에는 칼 대신 샌드페이퍼로 문지르거나 검정 사인펜으로 한 줄씩 긋는 ‘글귀 지우기’로 작업 방식을 바꾸며 문자와 사진, 이미지 드로잉 등이 첨가되는 독창적인 형식을 갖춘다.
그의 대표 시리즈인 메모는 1979년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기억과 형상 언어, 이미지 간의 조응을 화면에 담아낸다. 글자를 지우거나 긁는 행위는 원상태로 되돌려 버림으로써 소외돼 가는 모든 것에 대한 원초적인 접근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조명해야 할 사건이나 정보를 담은 신문과 잡지 기사를 주요 소재로 선택한 건 당시 엄혹한 정치·사회 현상에 대한 발언이자 저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체의 신뢰와 진실에 대한 도전, 개인과 사회의 관계 재구성, 사회와 일상의 연결 등 작가의 행위적 결과인 작품은 매체에 대한 ‘팩트 체크’를 넘어 상황과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이야기한다.
메모 시리즈를 이어오다 최근 몇 년간은 꽃과 인물 위주의 회화를 보여주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자기 대표작인 메모에 근간을 두고 변화된 형태를 선보였다. 신문과 잡지 글자를 긁거나 볼펜으로 지운 후 꽃, 사람 등의 형상을 그리고 붙였다. 모눈종이처럼 전체 화면을 일일이 작은 사각형으로 분할한 후 점을 찍고 곤충이나 식물을 그려 넣기도 한다.
색이나 형태는 더욱 강렬해졌고,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에 대한 경고와 저항의 메시지는 여전히 짱짱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 화백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는 결과물이다. 메시지를 떠나 직관적인 이미지 그 자체로 즐길 수도 있다”고 소개했다.
전시를 기획한 최정경 아리안갤러리 대표는 “1970년대에 시작된 김 화백의 메모 시리즈는 2024년에 봐도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다. 지금 시대에도 작가 고유의 메시지 역시 유용하다. 서울 수도권이 아니라 지역을 지키다 보니 김 화백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지금부터라도 외국 아트페어에 김 화백의 작품을 적극 소개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김응기 개인전은 12일까지 열린다. 갤러리는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된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