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은퇴할 권리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재희 경성대 경제금융물류학부 교수

〈유토피아〉. 인류가 꿈꾸는 이상향을 서술한 책이다. 1516년 토머스 모어는 대양 한가운데 있는 섬 유토피아에서 5년간 지내다 돌아온 선원의 이야기를 전하는 식으로 당대의 혼란스러운 현실과 대비되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유토피아라고 해서 사회문제가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노년 빈곤율 청장년의 5.4배

은퇴 후 ‘소득절벽’ 심각한 탓

노인 취업률 OECD 최고 수준

정부 ‘고용 증대’ 정책으론 한계

일터 내몰기 전 소득재분배 강화

노인 사회안전망 확보 정책 펴야

〈유토피아〉에서는 누구나 하루 6시간씩 일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늙고 병들어 일할 수 없는 노인은 어떻게 하는가. 이들은 자살을 권유받는다. 사제나 공무원이 병으로 고통받는 노인에게 찾아가 자살을 권유하면, 이들은 굶어 죽든가 약을 먹고 고통 없이 잠들어 죽음을 맞이한다. 유토피아에서 노인의 이러한 자살은 명예로운 일이다. 스스로 사회에 짐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현명한 태도로 간주한다. 인류의 꿈을 실현한 이상향이라 하지만 병들고 쇠약한 노인이 쉴 자리는 없다.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2015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59명으로 OECD 평균의 3배다. 노인들은 어떤 이유로 자살하는가? 자살을 결심해 본 노인들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한 것은 생활비 문제 즉, 경제적 빈곤이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7%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지난 13일 정부는 관련 부처 합동으로 ‘고령인구 증가 대응 방안’을 발표했다. “고령인구 증가가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며 그 대책으로 고령인구의 고용 증대와 고령 친화 신산업 육성 등을 제시했다. 이 가운데 고령 친화 신산업 육성은 정책 수단이 적절히 강구된다면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의 대응 방안은 고령인구의 고용 증대에 중점을 두고 있어,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이미 한국의 노인 취업률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2017년 65~69세의 고용률은 46%로 아이슬란드 다음으로 높고, 70~74세의 고용률은 33%로 가장 높다. 정부 정책을 통해 노인을 위한 ‘좋은 일자리’를 얼마나 늘릴 수 있을지 의문이고, 설사 그런 일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많은 노인이 제대로 일할 처지에 있지 않다. 2017년 65세 이상 노인 중 89%가 만성 질환을 갖고 있으며, 51%는 3가지 이상의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은퇴한 노인들이 일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 빈곤 때문이다. 2019년 조사에서도 일하는 노인의 60%는 ‘생활비 보탬’을 그 이유로 지적했다. 오직 먹고살기 위해 평생 보람도 느끼지 못 하는 일에 매달리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안을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없다. 복지국가이고 포용국가라면, 누구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은퇴하고 생애의 일부를 여유롭게 지낼 권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노인 빈곤 문제에서 중요한 특징은, 은퇴 후에 소득이 크게 감소하는 ‘소득절벽’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은퇴 후 소득 감소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2015년 OECD 22개국 중 독일, 프랑스 등 15개국은 노년(퇴직자) 빈곤율이 청장년(근로자)의 0.4~1.0배 정도다. 노년 빈곤율이 청장년과 같거나 오히려 더 낮은 것이다. 다른 6개국도 일본 1.3배, 미국 1.4배 등으로 노년 빈곤율이 청장년보다 약간만 높다. 그러나 한국은 예외적으로 노년 빈곤율이 청장년의 5.4배에 달하는 극단적 양상을 보인다.

이런 ‘소득절벽’은 노인 빈곤문제에 대한 정부 역할이 미미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노인에 대한 정부지출은 OECD 국가 평균적으로 국민총생산의 7.7%인데 한국은 2.2%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부는 노인들을 일터로 내몰기에 앞서, 재정적 수단을 통해 소득재분배부터 강화하는 것이 순서다. 당장은 현세대 노인의 ‘최저생활’을 보장할 필요가 있으며, 향후 OECD 다른 국가들에 버금가는 수준까지 노인의 사회안전망을 확보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정부의 이번 대응 방안에서 재정적 지원 책무를 뒷전으로 미룬 것은 잘못이다. 재정 안정성 유지가 중요한 과제이긴 하지만, 고령인구 지원이 정부 재정을 파탄 낼 거라는 일각의 우려는 비현실적으로 과장된 것이다. 노인과 청년 간 세대 갈등을 부추기며 퍼주기 복지 프레임으로 옭아매기에는 한국 노인의 현실이 너무도 팍팍하다.

노인 빈곤과 청년 실업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양대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구 추세를 고려하면 청년 실업은 조만간 완화될 문제지만 노인 빈곤은 갈수록 심화할 문제다. 노인에게 은퇴할 권리를 빼앗고 자살을 강요하는, 유토피아 아닌 〈유토피아〉가 더 이상 우리의 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