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피해' 중사에 "살면서 한 번쯤 겪을 수도"…얼빠진 軍상관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가해자 엄벌' 유족 청원 이틀 만에 30여만 명 동의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공군 여성 부사관이 성추행 피해를 신고했으나 조직적 회유에 시달려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군이 조직적으로 피해자를 압박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가해자의 엄벌을 촉구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앞서 충남 서산의 공군20전투비행단 소속 이 모 중사는 지난 3월 초 선임인 장 모 중사로부터 강제로 회식에 불려 나간 뒤 귀갓길에 차량 뒷자리에서 강제추행을 당했다. 앞자리에선 후임 부사관이 운전 중이었다.

유족 측 변호인인 김정환 변호사에 따르면 이 중사는 성추행 피해 직후 상관에게 피해 사실을 신고했으나, 상관은 상부에 보고하는 대신 합의를 종용했다.

1일 MBC 보도에 따르면 성추행이 벌어진 당일 저녁 직속상관인 노 모 준위는 이 중사를 술자리로 불러내 "살면서 한 번쯤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은폐를 시도했다.

회식을 주도한 또 다른 직속상관 역시 "방역지침을 어기고 회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피해를 받는다"며 "가해자가 곧 전역을 할 테니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압박했다.

이 중사는 이튿날 유선으로 피해 사실을 정식 신고하고 이틀 뒤에는 두 달여 간 청원 휴가를 간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자발적으로 부대 전속도 요청했다.

그러나 상관들은 피해자 보호 매뉴얼을 따르는 대신 "없던 일로 해주면 안되겠냐"며 회유를 지속적으로 시도했고, 가해자인 장 중사는 '용서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며 협박했다.

군내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에 따르면 피해자의 상담·신고 시 '가해자와 즉시 분리' 등 조치가 이뤄지도록 규정돼 있는데, 군이 조직적으로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성추행 신고 후 극단적 선택한 이 모 중사의 모습. MBC 뉴스데스크 방송화면 캡처 성추행 신고 후 극단적 선택한 이 모 중사의 모습. MBC 뉴스데스크 방송화면 캡처

김 변호사는 "'물리적 분리'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고를 했는데 (상관인) 준위와 상사가 번갈아 가며 합의해주면 안 되냐고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같은 군인이자 이 중사의 약혼자에게도 "잘 말해서 좋게 좋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생각 좀 잘 해달라"며 합의를 종용했으나, 약혼자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 중사는 압박에 못 이겨 지난 4월 15일 성고충담당관에게 극단적 선택을 암시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고, 공군15비행단으로 즉시 전출이 결정됐다.

그러나 전출 부대에서도 압력은 계속됐다. 15비행단 대대장은 이 중사와 통화에서 코로나19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질책부터 쏟아냈다.

또 예정된 일정보다 이틀 먼저 출근할 것을 지시하고, 첫 출근 날부터 홀로 야근을 하도록 했다. 성추행 신고 뒤 2주의 휴가 기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적어서 제출하라고도 했다.

이에 약혼자는 이 중사의 상태를 우려, 같은 부대로 전출을 신청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앞당겼다. 그러나 이 중사가 혼인신고를 위해 반차를 내자 상관은 "너는 휴가를 이런 식으로 내느냐. 대대장에게 직접 보고해라"라고 질타했다.

결국 그는 전출 나흘 만인 22일 오전 부대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중사는 발견되기 하루 전 남자친구와 혼인신고를 마쳤으나 당일 저녁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사는 자신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과정을 휴대전화로 녹화하기까지 했다. 이 중사의 휴대전화에서는 '나의 몸이 더렵혀졌다' '모두 가해자 때문이다' 등 메모가 발견됐다.

이 중사가 사망했는데도 군의 대처는 미온적이었다. 김 변호사는 "사망 직후에도 유가족이 소속 부대가 아닌 공군본부 차원에서 수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못 해주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선택한 이 모 중사(왼쪽)와 약혼자. MBC 뉴스데스크 방송화면 캡처 성추행 피해 신고 후 극단선택한 이 모 중사(왼쪽)와 약혼자. MBC 뉴스데스크 방송화면 캡처

또 군 당국이 가해자인 장 모 중사를 불구속 상태로 수사해온 점에 대해서도 "주요 목격자와 관련 인원들이 모두 같은 부대"라며 "도주 및 증거인멸 가능성이 충분한데도 구속을 못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사건이 지난 5월 31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군은 뒤늦게 공식 사과하고 군 검·경 합동수사 방침을 밝혔다. 이 중사가 숨진 채 발견된지 열흘만이다.

김 변호사는 "사안의 심각성을 파악하는 데 사망 후 열흘이 걸렸다는 게 군이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수준"이라며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수사를) 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은 나날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사랑하는 제 딸 공군중사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은 이틀 만인 2일 오후 3시 현재 29만 6000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피해자 유족으로 추정되는 청원인은 "공군 부대 내 지속적인 괴롭힘과 이어진 성폭력 사건을 조직 내 무마, 은폐, 압박 합의종용, 묵살, 피해자 보호 미조치로 인한 우리 딸(공군중사)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유족은 "제 딸은 왜 자신의 죽음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남기고 떠났을까"라며 "최고 지휘관과 말단 간부까지 성폭력 피해자인 제 딸에게 피해자 보호 프로그램인 메뉴얼을 적용하지 않고 오히려 정식절차라는 핑계로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를 가한 책임자 모두를 조사해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청원은 게시 하루 만인 1일 오후 20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공식 답변 조건을 충족했으나 이후로도 서명에 동참하는 이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욱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 연합뉴스

한편 서욱 국방부 장관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1일 오후 7시부로 이번 사건을 공군에서 국방부 검찰단으로 이관하여 수사할 것을 지시했다.

국방부는 "초동수사과정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었는지, 2차 가해가 있었는지 등을 포함해 사건의 전 과정에서 지휘관리 감독 및 지휘조치상에 문제점이 없었는지 면밀히 살피면서 수사 전반에 대한 투명성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1일 저녁 고인이 안치된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을 면담한 자리에서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서 장관, 이성용 공군참모총장과 통화했다"며 "이 사건은 공군이 맡으면 절대 안 된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처음에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송 대표는 "공군이 어떻게 (이 사건의) 지휘 감독상 책임을 지냐. 서 장관이 처음에는 공군 경찰에 무엇인가를 추가할 생각이었는데 (저는) 무조건 이것을 바꿔야 한다 했고, 잘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앞서 김부겸 국무총리도 1일 서욱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의 대응을 강하게 질책하고 사건의 전말과 은폐·회유·합의 시도 등 2차 가해 의혹을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김 총리는 또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군 조직의 성폭력·성희롱 사건 대응 실태와 시스템을 철저히 재점검하고 근본적인 개선책을 마련해 보고하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와 정춘숙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김병주 의원 등이 1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의무사령부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와 정춘숙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김병주 의원 등이 1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의무사령부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과 엄정 조사 예고가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윤호중 원내대표는 전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매우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하고 가해자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군 당국에 요청한다"며 "당은 국방위, 법사위, 여성가족위를 열어 이 문제를 철저하게 다뤄나가겠다"고 말했다.

국방위원인 홍영표 의원도 "피해자에 대한 군의 대응은 참담했다"며 "철저한 조사를 통해 회유와 압박에 가담한 이들을 일벌백계해야 한다"고 했고, 이낙연 전 대표는 "군율은 물론 인권의 기본도 찾아볼 수 없는 처참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배준영 대변인은 논평에서 "군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호했다. 동료 군인들을 생각해 달라는 등 조직적인 은폐와 회유, 압박을 멈추지 않았고, 즉각 분리 조치도 하지 않았다"며 "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군 기강이라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마음 놓고 군대에 보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하태경 의원은 "군은 사건을 은폐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했지만, 믿기 힘들다"며 "군검찰이 피해자에게 물어볼 것이 남았다고 수사를 2개월이나 질질 끌며 보충 수사를 했다. 이를 핑계로 합의 종용 시간을 벌어준 건 아니었을까"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군이 폐쇄적 시스템을 악용해 잘못을 저지르고도 꽁꽁 숨겨두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암묵적으로 그런 은폐 문화가 있는 것 같다"며 "이참에 제 식구 감싸기식 군의 폐쇄적 조직 문화를 싹 뜯어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