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40곳 염원 철저히 무시… ‘서울 후보지’ 일방 발표
“지역에서 혁명이라도 일으켜야지. 나라 꼴이 이게 뭔지 모르겠다.”
부산 한 원로 문화인은 노기 서린 목소리로 문화체육관광부의 일방적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관(가칭·이하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 발표에 대한 지역의 반발을 대변했다. 문체부가 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로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와 송현동 부지 2곳을 전격 발표했다. 두 달여 가까이 이건희 기증관 유치 활동을 펼쳐 온 전국 40여 개 지역의 염원을 철저하게 짓밟는 내용이었다.
지역서 요구한 공모 절차 배제
결정적 영향 미친 ‘소장품 활용위’
지역 인사 한 명뿐 ‘불균형 구성’
수도권 일방주의 행정 다시 확인
문체부의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 발표는 부산을 비롯한 여러 지자체가 줄기차게 요구한 공모 절차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후보지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또 후보지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이하 위원회)에 지역 인사는 단 한 명만 배치하는 등 의사결정 과정 곳곳에서 고질적인 ‘수도권 일방주의’ 행정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올 4월 28일 이건희 컬렉션 기증 이후 부산을 시작으로 각 지자체가 앞다퉈 이건희 기증관 유치 의사를 밝혔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5월 13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입지 선정을 공모 절차로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다른 지자체들도 공모 절차를 통한 공정 경쟁에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문체부는 이런 지역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일사천리로 서울 내 두 곳의 후보지를 발표해 지역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공간화랑 신옥진 대표는 “문화분권에 대한 지역민 염원을 짓밟는 졸속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신 대표는 “공모를 하면 행정력이나 비용이 들고 지역에서 경쟁이 더 치열할 것을 우려했다고 주장하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민주주의라는 것이 경쟁해서 공정하게 뽑는 것인데 지역이 경쟁에 휩쓸린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지역의 한 미술 전문가는 “40곳이 넘는 지자체의 요구를 외면하는 것을 보면 문체부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며 “국가균형발전 측면에서 최소한의 조사를 해 봤는지,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인지 민원을 넣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 여론 무시는 이번 후보지 선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위원회 인적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총 7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 지역 인사는 장인경 철박물관 관장(충청북도 박물관·미술관 협회장) 단 1명에 불과하다.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한 국립중앙박물관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문화예술정책실장 등을 포함해도 지역 인사는 11명 중 1명에 그친다.
문화계 한 인사는 “정책 결정에 국토 균형발전의 취지가 반영되려면 실제로 균형추가 작동해야 하는데, 이렇게 수도권 인사 위주로 위원회를 구성해 놓으면 그 결과는 뻔한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기증품 관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경험과 인력이 필요하다는 위원회의 발표에 대해서는 애초에 지역에 소장품이나 전문 인력 확대 등 정책적 지원을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문제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송우 부경대 명예교수는 “지역문화진흥법은 문화향유 격차를 줄이겠다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목적인데, 이번 결정은 지역문화진흥법을 만들어 놓고 말만 지역이지 수도권 일극화를 강화하는 비민주적이고 독재적인 발상이다”고 규탄했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