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산 소총 K1, K2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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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 인in人] 3. 최영진 SNT모티브 연구 고문의 K1, K2 개발사


최영진 전 SNT모티브 연구 고문. 최영진 전 SNT모티브 연구 고문.

그의 손에 남은 흉터가 아직도 선명했다. 최초의 국산 소총 K1과 K2 소총을 개발하며 입은 훈장 같은 상흔이다. “보어스코프라는 장비가 있어요. 총구 속에 집어넣어 탄착 위치를 가늠하는 일종의 망원경이죠. 발사 시험을 하며 보어스코프가 총구 속에 있는 걸 깜박하고 방아쇠를 당겼죠. 실수였습니다. 덕분에 명색이 국산 소총 연구위원이었는데 체면 없게 됐죠.”

평생을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국산 소총 연구에 매진 했고, 은퇴 후 SNT모티브에서 7년을 또 연구 고문으로 봉직한 최영진(75) (사)한국무기체계안전협회 이사가 최초의 국산소총을 개발할 때 겪었던 사고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최 위원 손등의 흉터. 최 위원 손등의 흉터.

최 연구위원은 2011년 국방과학연구소 전문 연구위원에서 은퇴했다. 이후 입사한 SNT모티브에서 방산 파트 연구 고문으로 소화기 개발 업무를 자문하다가 2018년 후배들에게 일을 물려줬다. 지금은 대전에 거주하면서 한국무기체계안전협회 전문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평생 연구했던 노하우를 비슷한 일을 했던 학자 등과 공유하는 거죠. 우리의 연구 성과가 후배들에게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최 연구위원은 한국이 자체 개발한 최초의 국산 소총 K1, K2을 만드는 데 헌신했다.


총기 박람회에서 총기를 살펴보는 최영진 연구위원. 총기 박람회에서 총기를 살펴보는 최영진 연구위원.

국산 소총 개발 프로젝트

"제가 국방과학연구소에 입사한 해는 1975년입니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석사 과정까지 마쳤는데 마침 채용 공고가 난 거예요. 국방연구소장이 장관 대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탄생한 국방과학연구소는 당시 엘리트 공대생에게는 취업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최 연구위원은 기억했다.

"박 대통령이 1972년 '군의 기본 화기인 소총을 국내 독자 기술로 개발해 국내 방위산업의 기반 기술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당시 국방부 조병창에선 M16을 자체 생산했지만, 국방과학연구소는 오롯이 국산 소총 개발에 나섭니다. 미국 등 우방국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국내 과학자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죠."

최 연구위원은 M16이 있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군의 기본화기인 소총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해 무장하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했다. 북한은 총기, 화포, 탱크를 자체 대량생산하는 데 반해 우리는 월남전 참전 대가로 국군현대화 계획을 미국이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신통치 않았다는 것. 국방과학연구소의 첫 국산 총기 시도는 각종 총기의 모방 개발을 통한 '번개 개발'이었다.

"예를 들어 ‘M1 총열에 칼빈소총 개머리판’ 이런 식이었죠. 이른바 '번개사업'이라고 불렀습니다. 각 총기를 분해해 적당히 새롭게 조립하고 시험하는 식이었죠. 처음에 그랬습니다. 제가 입사한 이후 국산 소총 개발이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최 연구위원은 최고의 국산 소총을 만들기 위해 미국과 독일, 벨기에는 물론 러시아 총기까지 샅샅이 연구했다. 당시 세계에서 이름난 총기는 미국의 M16과 러시아제 AK47이었다고 했다. "최고의 소총을 만들기 위해 적대국의 총기도 제대로 연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정밀 가공과 전자 기술은 미국이 앞섰고, 구조가 단순하고 운용성이 좋은 것은 러시아가 강했죠." 1947년 러시아인 칼라쉬니코프가 만든 AK47은 숙명의 라이벌인 M16 개발자 유진 스토너 조차도 우수성을 극찬했다고 한다.


1980년 5월 미국 출장 당시 맨해튼에서의 최 연구위원. 1980년 5월 미국 출장 당시 맨해튼에서의 최 연구위원.

최고의 소총을 만들어라

"모래가 들어가도 발사될 정도로 뛰어난 총이 AK47입니다. 장점인 가스 피스톤 작동방식을 K2에 적용했습니다. K2의 총열 등은 M16의 재질과 가공 방식 그대로 적용했고요."

미국 총기 개발의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 소화기시험장으로 간 시기가 1980년 5월이었다는 최 연구위원은 광주의 민주화운동 진압 영상을 미국 맨해튼 한 호텔에서 TV로 보고 충격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국산 총기 개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러시아도 방문했습니다. 총기 개발과 관련해 러시아 국방 영웅이라 불리는 기술자와 어깨동무를 할 정도로 정도 들었습니다. 이념이나 사상보다는 과학자로서 서로 통했던 거죠."


러시아 출장 당시 러시아 총기 연구 관련 영웅과 포옹. 러시아 출장 당시 러시아 총기 연구 관련 영웅과 포옹.

세계의 명품 소총의 장단점을 파악한 연구진은 K2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최 연구위원은 ‘최초의 국산 총기’는 세계 최고의 명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구진의 생각도 일치했다. 어차피 M16은 한국인과 다른 체형을 가진 미국인에 의해 개발된 것. 한국인이 쓰기에 편한 소총이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한국인의 인체 데이터를 수집했다. 총기의 내구성이나 재질 등은 어느 정도 연구가 되었지만,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총기를 만드는 것도 과제였다.

"견착했을 때 안정적이어야 합니다. 조준경과 방아손잡이도 편해야 사격이 원활하죠. 저희가 수집해 정리한 인체 데이터를 통해 만든 총기 디자인을 당시 홍익대 산업디자인 교수에게 자문 받으러 갔습니다. 그 교수가 깜짝 놀라더군요."

최 연구위원은 이후에 일이지만, 한국군 그것도 일부 장교들이 K2를 받아 들고 '총이 작다'고 했을 때 살짝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물론 군인들이 오래 사용해 M16이 익숙했지만 한국군 체형에 맞도록 방아손잡이 크기, 개머리판부터 가늠자 위치, 총대까지의 거리 등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한 것을 못 알아주는 것이 섭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K2는 현재 세계 10개국 이상에 수출될 정도로 품질을 증명받았다.


혹독했던 탄생 시험

번개사업으로 만든 시험 소총은 모두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개념 연구와 탐색 개발부터 시작해야 했다. 물속에 잠기거나 흙이 들어가도 고장이 적어야 했다. 어두운 밤에도 쉽게 분해조립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가공이 용이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설계해야 했다. 정확도, 유효 사거리, 신뢰성, 정비 용이성 등이 기본이었다.


미국 총기회사에서 사격 시험 중인 최 연구위원. 미국 총기회사에서 사격 시험 중인 최 연구위원.

최 연구위원이 미국 출장을 갔을 때다. 그 쪽 회사가 생산한 총을 쏘게 해 주었다. 총기 회사가 손님에게 자사가 만든 총을 쏘게 하는 것은 최고의 예우라고 했다. 그러나 최 연구위원은 그 회사의 시험 장비에 주목했다. 챔버였다. "소총은 극한 조건에서도 발사되어야 합니다. 비가 엄청 쏟아질 때나, 모래 먼지가 날릴 때, 극한의 추위나 고온에서도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K2는 그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개발했다.

"저온 사격 시험은 영하 51도에서 6시간 유지 후 600발 사격했습니다. 지구상에 이런 기후가 있을까 싶었지만 시베리아 오마야콘의 1월 평균 온도가 영하 51도라고 하더군요." 모래 먼지를 고성능 선풍기로 뿌리며 시험했고, 시간당 610mm의 폭우를 산정하고도 시험했다. 폭우 시험은 현실적으로 이 같은 강우가 불가능해 물탱크에 파이프 연결해 상황을 만들었다. 염수 침적 시험. 섭씨 71도에서의 고온 사격 시험도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영하의 시험기 안에서 사격을 위해 밖으로 나오니 결로가 생겨 버리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미국 출장 때였다.

"미국 총기시험장은 극한의 조건 속에서 바로 사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험장이 없으니 챔버에 쪽문을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적용했죠. 그렇게 해서 제대로된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챔버. 사격하도록 구멍이 있다.ADD 홍보영상 캡처 챔버. 사격하도록 구멍이 있다.ADD 홍보영상 캡처


최 연구위원이 현업일 때 모래 먼지 시험. ADD홍보영상 캡처 최 연구위원이 현업일 때 모래 먼지 시험. ADD홍보영상 캡처

610mm 강우시험 장면. ADD 홍보영상 캡처 610mm 강우시험 장면. ADD 홍보영상 캡처


동지들과 혼신을 다하다


"소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가 정확도죠. 그러기 위해선 탄도를 측정해야 하는데 당시엔 도플러 레이더(탄도 측정기)가 없었습니다. 50m, 100m, 150m… 사거리마다 표적을 세워 놓고 사격을 했는데 당시 뙤약볕 밑에서 사격이 끝나면 일일이 탄착점을 확인하던 이가 황해웅 박사입니다. 당시 대위였는데 나중에 준장까지 진급했고, 국방과학연구소장과 한국기계연구원장도 역임했죠. 자칫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죠." 최 연구위원은 그렇게 해서 K2 소총이 100m 사거리에서 8cm 위에 맞으면 250m에서는 명중한다는 데이터를 얻었다고 했다. 꼬박 2주일이 걸렸단다. 이 과정에 최 연구위원의 그 유명한 총구 속의 보어스코프 격발 사고도 발생했다.


표적지 시험 사격 중인 최 연구위원. ADD홍보영상 캡처 표적지 시험 사격 중인 최 연구위원. ADD홍보영상 캡처

후임 연구자로는 김인우 박사가 있었다. 최 연구위원은 추진력이 강한 김 박사를 소화기부서로 배치했다. 국방연구소 내에서도 소화기는 비인기부서였다. 다들 당시 유행하던 미사일개발부서 등을 선호했다. 국산 소총을 개발하려면 유능한 인력이 꼭 필요했기에 최 연구위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 연구원을 김 박사를 부서로 이끌었다. 사실 당시 육군은 국산 소총 개발에 미온적이었단다. '이미 M16이 있는 데 뭐하러 또 총을 만드나?' 현역 군인들의 비토는 견디기 힘들었지만, 소화기 연구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저희들이 포기했으면 K1, K2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어진 국군의 K시리즈 소화기 또한 탄생하지 못 했습니다. 여전히 미국 콜트사에 로열티를 주면서 M16을 쓰고 있겠죠" 최 연구위원의 말에 자부심이 묻어 났다. 최 연구위원은 언젠가 후배 김 박사에게 "미안하다. 더 중요한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소화기 부서로 끌어들여서 말이다"라고 사과했단다. 그랬더니 김 박사는 "미사일 했으면 연구소에서 중책(본부장)을 맡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K시리즈의 원조는 K1 차지

혹독한 현장 시험을 거치면서 최초의 국산 총기 K2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무렵 갑자기 군 특수부대에서 요청이 왔다. '특수부대원들이 쓸 수 있는 휴대성이 좋은 기관단총을 먼저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다. 사실 K2 개발이 거의 마무리 단계라 연구원들은 '총열의 길이만 줄이면 되겠다'고 판단했다.


K1A. K1A.

그래서 K2보다 먼저 실전에 배치된 최초의 국산 소총 K1 기관단총이 탄생한다. 이 총이 국산소총 1호 K1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쌍둥이의 배아가 나중에 생긴 것이 세상에는 먼저 탄생하는 이치와 같은 경우였다. 그렇게 탄생한 K1은 1981년도부터 실전 배치됐다. 이후 여러 차례 개량을 거쳤다.

K1은 K2의 총열을 짧게 하고 윗총몸 뭉치는 새로 개발했지만, 아래 총몸 뭉치는 K2 것을 그대로 사용하게 했다. 그래서 K1과 K2는 총몸을 서로 바꿔 사용할 수 있어 호환성이 뛰어나다. 사실상 쌍둥이 총이기에 그렇다.


외국 바이어와 함께 한 최 연구위원. 외국 바이어와 함께 한 최 연구위원.

100만 발의 사격 시험, K2 탄생

1972년 박 대통령의 소총 개발 지시 이후 10년 만인 1982년 드디어 K2 소총이 국방 규격화를 완료하고, 육군 무기 체계로 공식 채택된다. 이후 1984년부터 양산하여 우리 군의 주력 기종으로 사용했다.


197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박정희 대통령 초상화 앞을 통과하는 중장비 부대.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국산 소총 개발을 지시했다. 부산일보 DB 1973년 10월 1일 국군의 날 박정희 대통령 초상화 앞을 통과하는 중장비 부대.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국산 소총 개발을 지시했다. 부산일보 DB

혹독한 기상 조건에서의 시험. 이 과정에서 5.56mm 탄환 100만 발이 소요됐다. 최 연구위원은 "개발을 마치고 육군보병학교와 특수부대, 해병대 등에서 운용시험을 했습니다. 사용자 운용 적합성, 사거리 별 명중도 시험, 야간 사격 시험 등을 거쳐 '전투용 사용가' 판정을 받았을 때가 가장 기분 좋았습니다. '우리가 해냈다'고 모두 얼싸 안았죠." 최 연구위원은 "K2 소총 개발로 자주국방을 이룩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자부심을 가진다"고 뿌듯해 했다.


국산 소총 K2. 국산 소총 K2.

K2는 성능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는 게 최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우선 강선회전율이 빨라 탄자가 1초에 5200번 회전합니다. M16은 3200번 정도죠. K2의 유효사거리는 600m나 됩니다. 3발씩 끊어 쏘는 점사 사격이 가능하고, 가늠쇠틀은 동심 원리를 채택해 가상 십자 조준 원리보다 조준이 빠르고 정확합니다. 연발사격 때 총구가 들리는 총구앙등억제 소염기도 개발해 연발 명중률을 향상했습니다."

최 연구위원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자부심은 이유가 충분했다. 최 연구위원은 SNT모티브 재직 시절 대학 등지에서 '국산 소화기 관련' 특강을 자주 진행하기도 했다. 최 연구위원은 일부 강의에서 '국산 소총의 효시는 조선시대 승자 총통이다'고 제시한 적도 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SNT모티브의 국산 소총 개발 관록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자주국방을 염원한 조상의 빛난 얼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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