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 동안 K4 고속유탄기관총 500발 연속 발사 타격점 초토화 되자 모두 환호
[자주국방 인in人] 4. 이병완 SNT모티브 고문의 유탄기관총, 유탄발사기 개발사
“K4 고속유탄기관총으로 약 2분 동안 유탄 500발을 연속으로 신나게 쏘았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듯 유탄이 타격점을 완전히 초토화했습니다. 정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K4 고속유탄기관총과 K201 유탄발사기의 개발 주역 중 한 명인 이병완 SNT모티브(주) 고문은 개발 당시의 감동을 위와 같이 설명했다.
이 고문은 “1990년께 국방과학연구소 관할 시험장에서 전투사용적합성 평가를 무사히 마쳤을 때, 무기체계 평가시험 관련 장교가 ‘500발을 연발로 사격해 보라’고 했다”며 “48발들이 탄통 11개를 준비한 다음 800m 떨어진 타격점을 향해 발사했던 장면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이 고문은 초등학교 3년 때 부산으로 이사 왔다. 동래고를 거쳐 부산대에 입학, 대학원(소성가공)을 마친 그는1982년 방산특례요원으로 대우정밀공업에 입사했다.
이 고문이 입사한 시기는 우리 손으로 만든 최초의 국산 소총 K2가 육군 무기 체계로 공식 채택된 해이다. M16의 규격에 맞게 개발된 M203 유탄발사기 대신 대한민국 국군 제식 소총이 된 K2에 맞는 유탄발사기(K201)의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K201 개발팀에 참여한 이 고문은 “알루미늄 재질의 K201 총강이 마모되는 문제를 극복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고문은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의심하다 도면을 보고 문제점을 찾아냈다. 이 고문은 “도면에는 유탄 표면에 연한 화성피막처리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실제 유탄에는 단단한 양극산화피막처리가 되어 있었다”며 “이를 수정한 다음 야외사격을 통해 총강이 마모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고문 등의 노력으로 K201 유탄발사기는 1985년 개발이 완료됐으며, 1987년에 양산되기 시작해 지금까지 한국군 제식 유탄발사기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고문은 또 K4 고속유탄기관총 개발에도 기여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Mk.19 고속유탄기관총이 적 밀집부대와 매복·화기진지, 장갑차 등의 제압에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 것에 감명받은 육군의 요청으로 국방과학연구소(ADD)와 대우정밀공업(현 SNT모티브)가 개발에 착수했다.
이 고문은 동료와 함께 탄도설계와 탄 자동공급과 격발 등의 시스템설계를 맡았다.
이 고문은 “개발팀 대부분은 미국의 Mk.19 고속유탄기관총 사진 한 장, 혹은 실물을 한번 보고 맨땅에 헤딩하듯 개발을 시작했다”며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어 도미 기사가 가져온 각종 기술서적을 보면서 하나하나 익히고, 공장에서 실제로 적용해 보는 식으로 개발해 나갔다”고 말했다.
이 고문은 대학 때 배운 포물선방정식을 활용한 탄도를 계산하기도 했다.
개발 1년 만에 1차 시제품이 완성됐다. 그러나 40mm 유탄을 자동으로 발사하기에는 총몸 전체의 시스템이 취약했다. 취약한 부품을 찾아 강성을 보강해 나갔다.
이 고문은 “총열 개발이 가장 어려웠다”며 “구경 40mm 총열 제작 설비가 없어 대우중공업의 장비를 인수하고, 절삭 툴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해 강선을 깎아야 했다”고 말했다.
1988년 이 고문을 비롯해 개발팀은 미국 동부 메인주 사코시 MK.19 공장을 방문했다.
이 고문은 “미국 기술자들은 공이 부품과 총몸 용접, 총열을 어떻게 만드는지,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며 “공장 노조의 반대로 자세히 구경하지 못하고 겉만 보고 왔지만, 이를 통해 ‘이 정도면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고문은 “문제는 총몸 개발뿐만이 아니었다”며 “40mm 유탄은 다른 회사에 개발했는데 사격 시험 때 이 탄이 공중에 터지거나 불발탄이 발생하기도 해서 담당자와 많이 싸우기도 했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 모두 고생을 많이 했으며,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고문 등의 노력으로 1990년 K4 고속유탄기관총은 개발 완료돼 국내는 물론 중동과 남미, 동남아 등으로 수출되고 있다.
이 고문은 기계사업부장(이사), 자동차부품 사업본부장, 연구소장, 해외사업본부장, 2018년 전무이사를 거쳐 올해부터 고문을 맡고 있다.
이 고문은 “K4 고속유탄기관총은 한 번에 나온 것이 아니고 세 번의 개선 과정을 거쳐 나왔다”며 “현재 SNT 모티브는 세계적인 기본화기를 충분히 잘 개발하고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한 회사이므로 지속해서 연구하고 개발하면 세계 일류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군의 고속유탄기관총은 사막의 폭풍 작전 때 맹활약을 했다”며 “자주국방의 기본과 시작점인 개인화기 개발에 청춘을 다 바친 저는 비록 현업을 떠났지만 후진들이 지속적인 개인화기 개발로 자주국방에 매진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은 1973년 11월 29일 국방부 조병창 건립 기념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국방은 한 나라의 존립을 보장하는 최대의 요건. 방비를 등한히 해 외적의 침략을 받았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말자. 여기 자주국방을 다짐하는 무기 생산의 터전을 마련했다. 우람한 가동 소리는 조국의 영원한 안전과 자유를 굳건히 보장하리라.' 선생의 말씀을 축약했지만 대한민국 자주국방의 시원이 부산 기장군 철마면 전 국방부 조병창이다. 조병창은 (주)대우정밀로 민영화한 뒤 현재 SNT그룹(회장 최평규)의 SNT모티브로 발돋움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자주국방의 대의는 면면히 이어진다. 그 거룩한 여정에 묵묵히 복무한 이들을 발굴해 <부산일보>는 ‘자주국방 인in人 시리즈’를 지면과 온라인에 연재한다. 모든 영웅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를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임원철 선임기자 wcl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