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숨비] “조퇴하고 물질하러 다녔지"… 다대포 해녀 윤복득 이야기 #2-1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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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숨비’는 제주도 밖 육지 해녀의 대명사인 부산 해녀를 기록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부산은 제주도 해녀들이 처음 출향 물질을 하며 정착한 곳이지만, 지난해 말 기준 60대 미만 부산 해녀는 20명만 남았습니다. 인터뷰와 사료 발굴 등을 통해 사라져가는 부산 해녀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고, 물질에 동행해 ‘그들이 사는 세상’도 생생히 전달할 예정입니다. 제주도 해녀보다 관심이 적은 육지 해녀가 주목받는 계기로도 삼으려 합니다. 이번 기획 보도는 〈부산일보〉 지면, 온라인, 유튜브 채널 ‘부산일보’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산 사하구 다대어촌계 - 윤복득(71) 부녀회장 이야기>


열여덟 되던 해 고향을 떠났다. 스물다섯에 결혼해 부산 다대포에 정착했다. 어쩌다 보니 다대어촌계에서 해녀 대표 노릇을 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제주도 우도. 12살에 처음 바다에 들어갔다. 차가웠다. 물질은 13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가까이는 경남 남해, 멀리로는 충남 태안까지 ‘출향 물질’도 다녔다.

결혼하면 물질을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대포에 살게 됐다. 코끝에 바다 내음이 머무는 곳. 자식들 배 불리려면 바다로 가는 게 낫겠더라. 잠수복에 몸을 넣었고, 지금까지 물질하고 있다.


“선생님, 조퇴할게요”

1시간 수업을 듣고 조퇴했다. 몸이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물질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그렇게 바다로 나갔다. 학교에 다니며 물질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조퇴는 쉽게 허락받았다. 나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들 대부분이 물질을 갔다. 선생님들도 다 이해해줬다. 친구들과 주렁박 하나 메고 바다로 달려갔다. 그때 제주도에는 그런 풍경이 흔했다.

지금은 스티로폼으로 된 ‘테왁(해녀가 물질할 때 가슴에 받쳐 몸이 뜨게 하는 공 모양의 기구)’을 들고 나가지만, 그때는 속을 판 주렁박에 매달려 바다를 떠다녔다. 어릴 적에도 신문사에서 우리가 물질하는 모습을 찍어가곤 했다. 속곳 입고, 수건 머리에 올리고, 수경도 쓰고. 그때 찍은 사진이 한 3장 있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

부산 다대어촌계 윤복득 해녀가 이달 8일 물질로 수확한 해산물을 선박 위에서 정리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부산 다대어촌계 윤복득 해녀가 이달 8일 물질로 수확한 해산물을 선박 위에서 정리하고 있다.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좁은 방에 호롱불 하나

제주도에 오래 살진 않았다. 열여덟에 경남 남해로 ‘출향 물질’을 떠났다. 스무 살에는 충남 태안 신진도로 갔다. 고등학생 동생을 공부시키려면 돈이 필요했다.

부산 영도에 방을 얻어 동생들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여름에는 물질하러 다른 지역으로 넘어갔고, 겨울이 오면 미역도 캐서 영도 시장에 팔고 왔다. 출향 물질은 제주도에서도 흔했다. 어머니도 우리를 할머니들에게 맡겨 놓고 물질을 가곤 했다.

솔직히 다대포에서는 크게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없다. 그보다는 젊었을 때 어떻게 그렇게 일할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힘든 순간이 있었다.

19~20살 때 매물도에서 출향 물질을 했다. 매물도로 들어가다 보면 큰 ‘딱섬’이라는 데가 있다. 작은 딱섬은 사실상 무인도였다. 집이 딱 3동 있었다.

거기서 두 달 동안 물질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방 한 칸에 혼자 살면서 미역 등을 잡아 줬다. 밤이 되면 작은 방에 큰 지네가 나와서 기어 다녔다. 뿌득뿌득 벽이 긁히는 소리도 났다. 무서워서 호롱불을 켜면 벽에 붙은 지네가 뛰어다니고 그랬다.


■ 하루 물질로 버틴 하루

처음에는 말도 못 하도록 어렵게 살았다. 하루 물질하면 하루 먹고 살 정도였다. 1980년대 잠수복을 본격적으로 입기 전에는 많이 잡지도 못했다.

고무 잠수복을 입은 건 23살 정도다. 그전까지는 ‘물소중이’라는 얇은 옷을 입었다. 다대포에 왔을 때 잠수복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나이 든 해녀들이 젊은 해녀들 잠수복을 못 입게 하더라. 물에 오래 있으면 해산물을 한꺼번에 다 잡는다고. 시간이 지나면서 윗옷이 허용됐고, 조금 이따가 위아래, 마지막에는 오리발까지 차게 해주더라.

그렇게 계속 물질을 해왔다. 버티던 몸에서 탈이 났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물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편두통이었다. 해녀 일을 시작하면서 생긴 고질병.

두통은 30대부터 시작됐다. 진통제로 버티기엔 고통의 정도가 심했다. 부산에서 병원이란 병원은 다 가봤다. 삼성서울병원에도 8년을 다녔다. 지금도 동아대병원에 계속 가고 있다. 두통으로 물질은 15년 정도 쉬었다. 그러다 60대에 다시 시작했다.

윤복득 해녀가 이달 8일 다대포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윤복득 해녀가 이달 8일 다대포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다.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 ‘물발’ 좋은 부산

난 상군일 때도 있고, 중군일 때도 있다. 깊은 곳만 들어간다고 상군이 아니다. 얕은 곳에서도 수확물을 많이 가져오면 상군 대우를 해준다.

우뭇가사리랑 전복, 해삼이 돈이 많이 됐다. 전복은 1kg를 넘기면 10만 원을 받았다. 소라는 많이 잡힐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다. 지난해에는 많이 잡혔는데 올해는 눈을 씻고 봐도 잘 없다. 들쭉날쭉하다. 겨울 다대포에는 주로 해삼이 많다. 성게가 많이 잡힌 날에는 자갈치시장에다 넘겼다.

부산은 이른바 ‘물발’이 잔잔한 편이다. 제주도보다 물살이 물질하기에 좋다. 정월대보름 같은 특별한 날에는 막걸리 한 병을 사서 뿌리기도 한다. 용왕님에게 우리 모두 무탈하게 해 달라고. 해녀를 싣고 가는 배마다 다르다. 모든 배가 다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시락국만 먹을 순 없잖아”

다대포 해녀들은 전복을 공동으로 수확하기도 했다. 날을 잡아 물질해서 수익을 나눴다. 부녀회 회비도 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목욕비 명목으로 돌려주기도 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도 예전에는 해녀들끼리 온천도 가고 그랬다. 육고기도 먹으러 한 번씩 가고. 그래야 우리도 좀 사는 것 같았다. 우리가 시락국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나?

옛날에 해녀들을 천하게 봤지만, 지금은 또 안 그렇다. 제주 해녀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사람들과 어민들 시선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쥐 죽은 듯 살았는데 지금은 다르다. 불합리한 대우에는 맞서서 싸우기도 한다.

그동안 지원 좀 해달라고 하면 20명 남짓한 ‘다대포 해녀’가 뭘 요구하냐고 무시당했다. 그러면서 영도구 동삼어촌계랑 비교하더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게 동삼어촌계는 어촌계 5곳이 합쳐졌다. 사하구에는 우리뿐인데 좀 아쉽다.

기장군 연화리나 서구 암남동 같은 해녀촌을 우리도 해보고 싶다. 구청에서는 장소가 마땅한 곳이 없어서 못 해준다고 한다. 땅이 문제면 바다에 해달라고, 바닥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물 위에 짓는 건 어떠냐는 아이디어도 내고 있다. 구청장은 좋은 방법 같다고는 하던데. 기다려봐야지 뭐.

윤복득 해녀가 이달 8일 수확한 해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정수원 PD 윤복득 해녀가 이달 8일 수확한 해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정수원 PD

구심점 없는 부산 해녀들

내 몸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부녀회장 맡은 지 20년이 넘었다. 물려주고 싶은데 아무도 안 받으려고 한다. 책임감을 갖고 일하려면 아무래도 자기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 나도 언제까지 물질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른다.

요즘 전화 오는 사람이 많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어머니 우리가 도와줄 일 없습니까?”하고 묻더라. 그렇게 하면서 물질 좀 하고 싶다고. 안타깝지만 우리가 아직 후배를 키울 준비가 안 돼서 나중에라도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거제도는 학교를 만들어 해녀를 모집하고 있다. 제주도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해녀들을 후배라고 생각하면서 키우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부산 해녀가 계속 줄어드는 현실에서 부산을 아우를 구심점이 없다.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회장이 있으면 부산시 등에 목소리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책임자가 없다 보니 우리가 더 소외되는 것 같다. 소통할 데가 없다. 용호동이든 영도든 다 각자 말한다.


아들 둘 키운 엄마

다대포는 내게 특별한 곳이다. 배 안에 아이들이 있을 때도 여기서 물질했다. 큰아들이 10월에 태어났는데 9월까지 물질을 갔다. 내 어머니도 다대포에서 여생을 보내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동생들이 학업 때문에 부산으로 오면서 한동안 제주도에 홀로 남았다. 70대부터 다대포에 오신 어머니는 여기서도 물질을 하셨다.

요즘도 해녀가 된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돈을 벌겠나? 또 누가 육지에서 우리를 써줄까? 우리만의 자유 시간이 있고, 아들 둘을 키웠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었다. 넉넉지 않은 월급으로 생활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내가 벌어서 자식들에게 주고 싶었다. 그게 나도 편하다. 오히려 집에만 있으면 더 머리가 아플 때도 있더라. 아파도 바다에 가면 머리가 시원해지더라. 다시 또 바다로 가게 된다.

덕분에 지금도 아이들한테 바라는 것 없이 떳떳하다. 이만하면 천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바다가 내 천직이다. 앞으로 가능할 때까지 물질하며 살고 싶다.


※윤복득 해녀 이야기는 인터뷰 내용에 기반해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뷰 원본은 기사 위쪽 영상과 유튜브 ‘부산일보’ 채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장병진 기자 joyful@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 정수원 PD blueskyda2@busan.com , 정윤혁 PD jyh687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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