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참변,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국민적 트라우마 남긴 참사
사고 순간 여과 없이 실시간 중계
지하철서 호흡 곤란·수면장애 등
평범한 시민들도 심리적 고통 호소
전문가 “미디어 노출 제한 등 필요”
직장인 이 모(34) 씨는 31일 아침 출근길 서울 9호선 급행열차를 타고 가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아 급히 내려야 했다. 5년째 매일 같이 타 꽤 익숙해진 9호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태원 압사 참사’ 뉴스를 접한 뒤부터 몸이 완전히 다르게 반응했다. 이 씨는 “여느 때처럼 객실 안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짓눌린 채 가고 있었는데 ‘이러다 나도 혹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고 진땀이 흘러 내렸다”며 “열차 안에서 ‘밀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많아졌고, 과거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압사에 대한 공포를 많이들 느끼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3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이태원 압사 참사로 인해, 부상자나 목격자가 아님에도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각종 SNS를 통해 참사의 순간이 여과 없이 실시간 중계되면서 전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나온다.
주부 전 모(55) 씨는 주말 내내 TV와 휴대전화로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했다. 언론 보도는 물론 유튜브나 SNS에서 떠도는 ‘실시간 이태원’의 모습도 여러 차례 보게 됐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참극이었기에 폭력적일 정도로 생생한 사고의 상황이 그대로 전해졌다. 의도치 않은 접근이었지만 충격은 생각보다 컸고, 전 씨는 수면유도제를 먹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전 씨는 “이태원 핼러윈 인파 아래 깔린 사람들의 안색이 변해 가는 영상이나 길거리에 널브러진 희생자들의 사진 등이 시도 때도 없이 계속 떠오른다”며 “그럴 때마다 우울감과 불안함,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고 전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도 참담한 심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은 한 커뮤니티를 통해 “아비규환의 현장 상황과 사망자들 시신이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며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 분이라도 더 살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살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사고와 관련된 내용을 두려워하면서도 찾아보는 게 자연스러운 심리라며, 사고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도 미디어를 통해 계속 소식을 접하면 목격자 못지않은 영향을 받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이하 학회)는 성명을 내고 “개인도, 집단도 감당할 수 없는 참변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며 “재난 사고의 수습과 대처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마음의 고통,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정찬승 학회 홍보위원장은 “이미 필요한 객관적인 정보는 대부분 다 접했을 것이다. 이제는 미디어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며 “사고 소식을 접한 이후 불안과 우울감이 커지고 잠을 잘 수 없는 등 일상생활이 어려워질 경우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주변에서도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지지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보건복지부는 국가트라우마센터에 심리지원단을 꾸려 정신건강전문의와 전문요원을 투입해 현장·전화 상담을 실시한다. 유족이나 부상자, 목격자가 아니어도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국가트라우마센터 홈페이지(https://www.nct.go.kr)에 접속하면 간단한 자가 진단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확인할 수 있다. 평범한 시민 중 이번 사고에 대한 심리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위기상담전화 1577-0199로 전화하면 된다.
안준영 기자 j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