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이념의 골 깊어진 지리산, 피로 젖다
[한국전쟁 정전 70년 한신협 공동기획] 민족 분열의 비극 ‘빨치산’
관공서·민가 습격 등 산에서 후방 교란
군경 화순 백아산 소탕전 50개 마을 소각
귀순 유도 ‘삐라’ 살포 불구 저항 이어져
1951년 1~4월 전남서 대규모 토벌작전
빨치산·군경 등 1만 4000여 명 숨져
낮엔 ‘부역자’ 밤엔 ‘반동’ 몰린 민간인
화순·담양·장성 등지에서 수백 명 희생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 분열의 비극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에서 유래했다.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으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한국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인민군이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다.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4월 전남에서 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으로 사살된 빨치산은 6921명에 달했다. 생포된 이는 603명이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
■전쟁 끝났지만, 귀순 못 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은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숨어 빨치산이 됐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졌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 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했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 합동작전이 전개됐다.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 작전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군 병력 이외에 경찰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가 설치됐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 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했다.
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지리산 인근에 ‘삐라(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빨치산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빨치산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
빨치산 세력이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군 일대였다.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1952년 4월 사이 1년 6개월 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 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쉬웠다.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에서는 탄광 노동자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다.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가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와 식량 약탈 등을 일삼았다.
이에 정부는 1950년 10월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과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백아산 일대에서는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다. 빨치산은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숨진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빨치산과의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했다. 밤에는 빨치산이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주민을 살해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진실의 윤곽은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드러났다. 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1952년 4월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국군의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1951년 3월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주민 291명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에서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
백아산에서는 최근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졌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31사단은 앞서 지난해 4월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
유연재 광주일보 기자 yjyou@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