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부산 유일 종이 빨대 업체, 재고 수천만 개, 한숨 수백만 번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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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빨대 계도기간 연장
"재고 1200만 개, 내달 문 닫아야"
생존 위해 직원 10명 무급 휴가
정부 믿었는데 모든 게 올스톱
재고 해결할 판로 마련 시급

23일 부산 사상구 A업체의 창고에 종이 빨대 재고가 가득 쌓여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23일 부산 사상구 A업체의 창고에 종이 빨대 재고가 가득 쌓여 있다. 이재찬 기자 chan@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 계도기간을 무기한 연장하겠다는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에 비판이 거센 가운데 부산의 유일한 ‘종이 빨대’ 생산업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23일 오후 1시 부산 사상구 A제지 생산공장. 성인 남성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 머리가 닿지 않는 높은 창고에 종이 빨대 박스가 천장까지 들어차 있다. 약 3000개의 박스가 200평 규모의 창고를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채우고 있다. 불 꺼진 공장 내부엔 적막감만 감돌았다. 힘차게 가동돼야 했을 생산 설비는 오래전 작동을 멈춘 듯 우두커니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한 쪽엔 전국에서 반품돼 돌아온 종이 빨대가 상자로 쌓여 있었다.

부산 사상구에 본사를 둔 A사는 지난 7일 환경부의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사실상 허용하는 일회용품 관리 방안이 발표된 후 폐업의 위기에 직면했다. 2018년 설립된 A사의 B 대표는 “생산은 했지만 정부 발표 이후 판로가 막혀 출고되지 못하고 그대로 쌓여있는 상태”라며 “원래는 계도기간이 끝나는 시점에 출고돼야 할 물량인데, 이제는 방법이 없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공장 임대료, 직원 월급, 은행이자 등 자금 압박이 커 당장 다음 달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고 덧붙였다.

A사의 직원은 원래 13명이다. 그러나 사정이 어려워지며 10명의 직원을 무급으로 휴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회사를 운영하기 위한 최소 인력만 남아있다. B 대표는 “직원들에게 12월에 다시 보자고 말은 했지만, 모든 게 불투명한 상태”라고 “전부 다 폐기해야 할 쓰레기다. 정부의 친환경 정책 하나만 바라보고 적자를 감수하며 달려왔는데 모든 게 올스톱돼 허탈하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회사의 종이 빨대는 2019년 조달청 혁신 시제품으로 선정됐다. 그해 11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2019 혁신 시제품 국회 특별 전시회’에 참가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전국 혁신 시제품 15개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기술력과 상품성을 인정받은 제품이다. 게다가 ‘2019 부산광역시 기술창업지원사업’에 선정돼 굽힐 수 있고, 길이 조절도 가능한 주름형 종이 빨대를 개발해 특허 출원까지 냈다. B 대표는 “중국산 종이 빨대가 국내에 유통되며 종이 빨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졌다.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국내서 생산하는 종이 빨대의 상품성은 매우 우수하다”고 말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정부는 종이 빨대 제조업체 등 매출이 줄어든 일회용품 대체품 제조업체에 내년 경영애로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로 확보다. 부산시 등 공공기관이 나서서 종이 빨대를 납품해달라는 요청은 아직 없는 상태다. B 대표는 “중소기업이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면, 결국 이 시장은 대기업의 차지가 되며 종이 빨대 단가 상승이라는 결과를 불러온다”며 “재고를 해결할 판로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당장 길거리에 내몰릴 판”이라고 밝혔다.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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