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 지침 없고 통합 관리 손 놓고… 한국 정자은행 '후진국' [남성 빠진 ‘반쪽’ 난임 대책]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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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국내 정자은행 현주소

기증 절차·선별 기준 등 가이드라인 부재
의사 단체나 병원마다 규정 달라 혼란도
여러 기관에 정자 기증해도 확인 어려워
난임 부부 출산 이력 파악 제대로 안 돼
정자 기증자 보호·보상 법안 하반기 시행
의료계 “적극적 보상이 기증 활성화 유도”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에서 기증 정자를 동결·보관하고 있는 모습.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제공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에서 기증 정자를 동결·보관하고 있는 모습.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제공

‘난임 진단·치료 기술은 세계 최고, 남성 가임력 보존과 난임 치료 시스템은 후진국’

의료계에서는 우리나라 정자은행의 현주소를 이렇게 진단한다. OECD 국가 중 국가 정자은행이 없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국가 정자은행이라는 하드웨어가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정자 기증·수증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 즉 기증자 선별 기준이나 기증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 제한 횟수 등에 대한 표준작업지침 역시 갖춰져 있지 않다. 전국 일부 대학병원과 난임 병원별로 산재된 정자은행에 대한 통합 관리 체계도 미비한 상태다.

■보조생식술 정부 표준작업지침 없다

정자은행은 정자 기증 희망자가 이메일이나 전화, 방문을 통해 기증 의사를 밝히면 대면 상담을 통해 기증 의도와 혈액형, 질병, 가족력 등을 확인한다. 이어 신분 확인, 문진표와 기증 동의서 작성 절차를 거쳐 정자를 채취한다. 정자의 활동성 등이 정상일 경우 혈액형과 성병, 간염, 염색체 이상 검사 등을 위해 소변과 혈액 검사를 실시한다. 6개월 뒤 기증자가 2차 방문해 에이즈 감염 여부까지 최종 확인하면 통상적인 기증 전 절차가 마무리된다.

정자은행 운영과 관련해서는 정부의 표준작업지침이 없다. 정자 기증 절차, 기증자 선별 기준, 수증자 조건, 기증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 제한 횟수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현장에서는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산부인과학회의 지침을 준용해 정자은행을 운영하고 시술하고 있다.

두 단체의 기준도 각각 다르고 모호한 부분도 있다. 의사협회는 기증자 조건으로 ‘감염성 질환 없는 건강한 남성’으로 규정하지만, 산부인과학회는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젊은 남성’과 ‘8촌 이내 혈연 금지’로 지침을 두고 있다. 두 군데 모두 ‘건강’을 중요한 기준으로 꼽았지만, 정작 건강에 대한 기준은 불분명하다. 이 때문에 각 난임병원마다 규정도 다르다. 한 난임 병원은 ‘나이 만 19세~39세, 키 175cm 이상 4년제 대학 재학·졸업 이상의 학력’을 정자 기증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배아생성 의료기관 표준운영지침’을 통해 기증자를 대상으로 난자 기증자에 준하는 건강 검진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지만, 기증자와 심층 상담을 통해 유전병과 정신 질환, 가족력까지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병원 자체의 선별 역량에 기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난임 병원들은 비용이 더 들지만 염색체 검사까지 실시하기도 한다.

정자 기증자 1명당 보조생식술 시술 횟수의 경우에는 의사협회는 ‘임신 10회 이하’, 산부인과학회는 ‘출생아 10명 이내’로 제한한다.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은 횟수를 ‘출생아 5명 이내’로 정하고 있다.

■기증 정자 통합 관리 체계 미비

정자 기증·수증 정보에 대한 통합 관리 시스템도 없다. 의사협회와 산부인과학회가 자체 지침으로 정자 기증자 1명당 보조생식술 시술 횟수를 제한하고 있지만, 기증자가 여러 정자은행에 정자를 기증할 경우, 다른 병원의 정자 기증 정보를 알 수 없어 이런 시술 횟수 제한 자체가 무의미하다.

기증 정자로 보조생식술을 받은 부부가 추후 출산까지 했는지 확인하도록 하는 규정이나 지침도 없어 정자은행을 이용한 난임 부부의 출산 이력도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다. 한 난임 병원 관계자는 “우리 병원에서 난임 시술을 받더라도 출산은 다른 산부인과에서 하기 때문에 출산까지 했는지 확인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정자은행을 운영하는 전국의 배아생성 의료기관들로부터 기증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 시행 건수를 보고 받고 있다. 하지만 자율 보고 형식이어서 정확한 수치라고 보기 어렵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기증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 시술 건수는 일부 보고하지 않는 곳도 있어 공개가 어렵다”고 밝혔다.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측은 “정부가 정자 기증·수증에 대한 관리·감독을 방기하고 있으며 실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정자 기증자 보상은 첫걸음

정자 기증 시 검사 비용은 병원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80만~100만 원 정도다.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은 병원 재원으로, 난임 병원들은 대부분 이후 정자를 수증하는 난임 부부가 부담한다. 정자 보관 비용은 정자은행마다 다르지만 연간 5만~10여만 원으로, 역시 수증하는 난임 부부가 부담한다. 생명윤리법상 정자 매매는 엄격히 금지된다. 이 때문에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은 교통비와 식사비 등 최소한의 실비만 정자 기증자에게 지원한다. 대부분의 난임 병원들은 교통비 정도만 지급한다.

생명윤리법은 난자 기증자에게는 시술과 회복에 걸리는 시간에 따른 보상금과 교통비를 정부가 정하는 금액 수준에서 지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정자 기증자에 대해서는 보상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자 기증자 지원은 커질 전망이다. 민주당 신현영 의원이 지난해 9월 대표 발의한 생명윤리법 일부개정안이 올 2월 국회를 통과하면서 정자 기증자에 대한 보호와 보상 법안이 마련돼 올 하반기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법안은 정자 기증 활성화와 정자 기증자 보호를 위해 생명윤리법상 ‘난자 기증자 보호’ 문구를 정자를 포함한 ‘생식세포 기증자 보호’로 변경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박민정 연구교수는 “정자 기증자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보상을 해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정자 기증이 활성화될 수 있다. 개별 난임 병원이 보상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 정자은행 네트워크를 통해 정자 기증자를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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