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권 명시·비혼 여성 출산권 공론화 서둘러야 [남성 빠진 '반쪽' 난임 대책]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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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국가 정자은행 설립 과제

정자 기증자·수증 부부 간 친권
법적 다툼 대비 제도 보완 필요
비혼 여성 기증 정자 통한 출산
산부인과학회 등 반대 넘어야
네트워크 구축 로드맵 수립도
기술력 갖춘 부산 거점화 충분

비혼 여성 출산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2020년 일본에서 기증 정자를 받아 출산한 방송인 사유리 씨와 아들 젠의 방송 출연 장면. KBS 화면 비혼 여성 출산 문제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2020년 일본에서 기증 정자를 받아 출산한 방송인 사유리 씨와 아들 젠의 방송 출연 장면. KBS 화면

국가 정자은행 설립을 위해서는 선결 과제들이 적지 않다. 정자 기증과 수증 과정에서 정자 기증자의 친권 포기와 수증 난임 부부의 친권 효력 발생을 사전에 명확히 해 향후 쟁송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해야 한다. 또 전통적 정상 가족의 개념이 점차 흐려지고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출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국민 의식 변화에 발맞춰 비혼 출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국가 정자은행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기증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에 대한 정부의 표준 작업지침을 만들고, 국가 정자은행의 거점과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로드맵 수립도 서둘러야 한다.

■수증 부부 이혼 때 친권 다툼도

기증 정자로 아이를 낳은 여성은 아이의 생물학적 어머니여서 민법상 친자 관계가 성립한다. 정자 기증자는 정자 기증과 동시에 친권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 친권 주장이 불가하고, 정자 수증 부부에게 아이에 대한 친권 효력이 발생한다. 부부 간 합의를 거쳐 기증 정자를 받아 아이를 낳고 친생자로 출생 신고를 했던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남편이 본인의 아이가 아니라는 소송을 했는데 패소한 대법원 판례도 있다.

현재 정자 기증자가 정자를 기증할 때 작성하는 ‘생식세포 동결·보존 동의서’에는 ‘동의권자(기증자)의 개인정보는 법에 따라 보호되며, 배아생성 의료기관은 동의권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돼 있다. 병원 측은 정자 수증 난임 부부에게 혈액형, 키 등 일부 유전 형질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개인정보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울러 난임 부부가 기증 정자를 받아 보조생식술을 받기 위해서는 남편이 시술 동의서를 쓰기 때문에 이를 새롭게 태어날 아이에 대한 친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으로 기증 정자를 이용한 난임 부부의 출산이 더욱 늘어나면, 친권에 대한 법적 다툼도 늘어날 수 있다. 그런 만큼 정자 기증자와 수증 부부의 친권 문제를 명확히 하는 법적,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정자 기증과 수증의 동의 과정에서 친권에 대해 보다 더 명확한 동의 절차를 거치도록 하거나, 정부의 보조생식술 표준 작업지침 마련을 통해 친권을 명확히 규정하는 방안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비혼 여성 출산 ‘뜨거운 감자’

2020년 방송인 사유리 씨가 일본에서 기증 정자를 받아 출산하면서 자발적 비혼 출산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잠시 불붙었다가 이내 수그러들었지만 비혼 출산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현재 국내에서 비혼 여성이 기증 정자를 이용해 출산을 위한 보조생식술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한산부인과학회가 ‘보조생식술은 난임 부부에 한해 시술할 수 있다’는 모자보건법상 법령을 근거로 ‘법 개정 우선’과 ‘사회적 합의 필요’ 등을 이유로 불허하기 때문이다.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관계자는 “2021년 12월 생명윤리법 시행 규칙 개정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비혼 여성이 기증 정자로 보조생식술을 받아 출산하는 것은 불법은 아니다. 그러나 보조생식술은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시행하기 때문에 산부인과학회의 불허 지침에 따라 불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선 2022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비혼 여성 A 씨 등의 진정을 받아들여 비혼 여성의 보조생식술을 제한하는 산부인과학회의 지침을 개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산부인과학회는 현행 윤리지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비혼 출산에 대한 포용적 인식은 확산되고 있고, 해외 정자은행으로 눈을 돌리는 비혼 여성도 늘고 있다. OECD 국가의 평균 혼외 출생 자녀 비율은 42%이지만, 우리나라는 3.9%(2022년 기준)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일부 인구학자들은 비혼 출산과 합계출산율이 비례하는 선진국의 사례를 근거로 인구 정책으로서 비혼 출산 허용을 검토해야 하는 시기가 됐다고 진단한다.

현재 국회에는 보조생식술을 ‘난임 부부’에 한정한 모자보건법을 혼인과 무관하게 ‘임신과 출산을 원하는 사람’으로 바꾼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종교 단체와 보수 단체의 반대로 계류 중이다. 국가생명윤리정책원 관계자는 “향후 비혼 출산 수요 증가에 맞춰 법적 문제와 권리 충돌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유리 씨 SNS. SNS 캡처 사유리 씨 SNS. SNS 캡처

■부산에 국가 정자은행을

국가 정자은행 설립은 불법 정자 매매와 비혼 출산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공론화 불씨를 지폈지만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정상 가족의 해체 또는 분화, 심각한 저출생 위기, 국민 인식 변화 등으로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우선 현장의 혼란을 없애기 위해 기증 정자를 이용한 보조생식술, 즉 정자 기증과 수증 조건, 정자 기증자 1인당 보조생식술 제한 횟수 등에 대한 정부의 표준 작업지침 마련이 시급하다.

아울러 국가 정자은행 거점과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로드맵 마련도 서둘러야 한다. 국내 최초 정자은행이자 공공형 정자은행인 ‘부산대병원 정자은행’과 정자은행의 국가적 활용을 위한 연구와 정책 개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이 있는 부산은 국가 정자은행 설립의 거점으로서 기반을 갖췄다. 두 기관은 실무와 연구·정책 개발을 연계한 국가 정자은행 설립의 좋은 표준화 모델이 될 수 있다. 특히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에는 2019년 정자 기증과 수증, 폐기, 보조생식술 이후 임신·출산 등의 모든 정보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일원화해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한국생식세포정보센터가 문을 열기도 했다. 과거 부산대병원 정자은행이 중심이 돼 전국의 주요 대학병원들과 구축한 공공형 정자은행 네크워크 역시 국가 정자은행 네트워크의 좋은 선례다.

박남철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 이사장은 “부산에는 세화병원 등 보조생식술 분야에서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병원들이 많다. 국가 정자은행 설립 시 민관 협업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고 밝혔다. -끝-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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