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신춘문예-희곡] 마지막 헹굼 시 유연제를 사용할 것/연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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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등장인물


희지 23세 작가 지망생

윤선 50대 주부

주인 60대 코인세탁소 주인


현대


장소

코인세탁소


무대


무대

위 세 대의 드럼 세탁기가 있다.

각각 소형, 중형, 대형으로 크기가 다르다.

세탁기 옆에는 두 대의 건조기가 있다.

세탁기 혹은 건조기 주변에 동전교환기가 있다.


세탁이 되는 동안 앉을 수 있는 의자 여러 개와

긴 테이블이 있다.


#1


자정 무렵, 아무도 없는 코인 세탁소.

고요한 가운데 희지가 세탁소 안으로 들어간다.

세탁소 안을 둘러보는 희지.

세탁기를 골라 뚜껑을 열고 세탁물을 넣기 시작한다.


소리 동전을 넣어주세요.


희지, 세탁물을 다 넣고 뚜껑을 닫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려 하는데 동전이 없다.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5000원짜리 지폐가 나온다.

동전 교환기에 다가가는 희지.

교환기에는 ‘고장’ 두 글자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희지 맨날 고장이야.


희지, 핸드폰으로 시계를 본다.


희지 집 갔다 오면 너무 늦는데...


희지, 세탁기 뚜껑을 열고 세탁물을 다시 꺼낼까 말까 고민한다.


소리 동전을 넣어주세요.

희지 잠시만...

소리 동전을 넣어주세요.

희지 에이씨.


다시 세탁기 뚜껑을 닫는 희지.

그때, 세탁소에 빨래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윤선.

희지를 보고 어색하게 서 있다가 세탁기를 고른 뒤 또 다시 어색하게 선다.


짧은 사이.


희지, 윤선에게 조심스레 다가간다.


희지 도와드릴까요?


윤선, 조금 놀라며 희지를 본다.


희지 처음 오신 것 같아서요.

윤선 (주저하며) 아... 그게...

희지 네?

윤선 아니에요.

희지 아...


희지, 민망한 듯 웃으며 자신의 세탁기 앞으로 가려는데

윤선, 희지를 잡는다.


윤선 그냥... 아무데나 쓰면 되나요?

희지 가져오신 빨래 양에 따라서 세탁기를 선택하고 넣으시면 돼요.

윤선 아... 감사합니다.

희지 아녜요. 혹시 세제는 가져오셨나요?

윤선 가져와야 하나요?


희지, 자신의 빨래 가방으로 다가가 세제를 꺼낸다.


희지 없으면 제 꺼 쓰세요. 자판기에서 사도 되는데 좀 비싸더라고요.


윤선, 희지를 물끄러미 본다.


희지 전 오늘 안 쓸 거라 괜찮아요.

윤선 (희지의 세탁기를 가리키며) 아가씨 꺼 아니에요?

희지 맞긴 한데... (짧은 사이) 돈이 없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동전이 없어요.

윤선 얼마가 부족한데요?

희지 3000원이요. 제가 5000원 짜리가 하나 있는데 (동전교환기를 가리키며) 저 모양이라... 오늘은 그냥 가야될 것 같아요.

윤선 드릴게요. 동전 많아요.

희지 네?

윤선 세제 샀다고 생각할게요.

희지 그래도 그건 좀... 이것보단 세제가 훨씬 싸요.

윤선 다음에 만나면 또 빌려주세요.


윤선,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희지에게 건넨다.


희지 이래도 되나 싶은데...

윤선 돼요.

희지 감사합니다.


윤선, 세탁기에 빨래를 넣는다.

윤선에게 받은 돈을 자신의 세탁기에 넣는 희지.

소리 (희지의 세탁기에서) 세탁을 시작합니다.


세탁기 뚜껑을 닫은 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자신의 세탁기에 넣는 윤선.


소리 (윤선의 세탁기에무서) 세탁을 시작합니다.


윤선과 희지, 서로 마주보며 슬쩍 미소 짓는다.


#2


며칠 후, 자정 무렵. 희지 혼자 세탁소 안에 있다.

윤선이 사용했던 세탁기에 고장 표시가 되어 있다.

희지, 고장 난 세탁기 앞을 기웃거린다.


희지 이것 봐. 또 고장이야.


희지, 동전 교환기를 본다.

교환기에 붙어 있던 고장 표시는 없다.

희지, 세탁기 안에 세탁물을 넣고 동전을 넣는다.


소리 세탁을 시작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자꾸만 입구를 바라보는 희지.

세탁 시간을 확인하고 의자에 앉는다.


희지 오늘은 안 오시나보네.


희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손에 쥔다.


희지 (동전을 보며) 돈 갚아야 하는데...


희지,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멍하니 앉아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세탁물을 바라본다.


짧은 사이.


희지의 핸드폰에 전화가 온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덮어버리는 희지.


희지, 다시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세탁물을 바라본다.


그때, 빨래 가방을 들고 세탁소에 들어오는 윤선.

검은 외투를 입고 있다.

희지, 윤선을 발견하고 반갑게 일어난다.

윤선, 조금 어색하게 희지에게 인사한다.


희지 오셨네요!

윤선 또 뵙네요.


윤선, 세탁기에 세탁물을 넣는다.

뚜껑을 닫고 어색하게 서 있자 윤선에게 다가가는 희지.


희지 잘 안 되나요?

윤선 여기... 유연제 넣을 때는 어떻게 해요? 멈추면 되나요? 저번에 못 넣고 빨아서 오늘은 넣으려고 하는데... 혹시 헹굼 때 멈췄다가 쓰면 또 돈 내야 하나 해서요.

희지 일시정지는 상관없어요.

윤선 다행이네요.

희지 근데 그냥 처음에 넣고 돌리면 되지 않아요?

윤선 뭘요?

희지 유연제요.

윤선 세제가 아니라 유연제를요?

희지 저는 항상 같이 넣고 돌렸는데.

윤선 지금도 그렇게 돌리고 있는 거예요?

희지 왜요?

윤선 섬유 유연제는 마지막 헹굼 때 넣는 거예요. 그 전에 넣으면 효과 없어요.

희지 정말요?

윤선 빨래하는 거 잘 모르겠으면 어머니께 여쭤 봐요. 그게 빨라요.

희지 같이 안 살아서...

윤선 자취하는구나.

희지 ...그렇죠.

윤선 전화해요. 안부도 물을 겸. 좋아하실 거 같은데... 우리 딸도 그렇게 가끔 전화해요. 나는 목소리도 듣고 너무 좋던데요? 엄마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 물어봐요.

희지 그건 사람마다 다르죠. 저는 엄마랑 싸우는 게 싫어서 자취하는 거거든요.

윤선 아... 미안해요.

희지 아녜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앞으론 마지막 헹굼 때 넣어봐야겠어요.

윤선 (괜히 오버하며) 그래요. 그래야 옷감도 안 상하고 더 부드러워지고 향기도 잘 나고 그렇거든요. 처음에 넣으면 다 씻겨 내려가잖아요. 마지막 단계에서 넣어야 돼요.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

희지 네, 감사합니다.


희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윤선에게 준다.


희지 이건 전에 빌린 돈이에요.

윤선 아녜요. 세제 빌려 썼잖아요.

희지 빚지는 걸 싫어해서요.


윤선, 희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동전을 받는다.


윤선 괜찮은데...


희지, 의자로 돌아가 앉는다.

윤선, 그런 희지를 바라보다가 기계에 동전을 넣는다.


소리 세탁을 시작합니다.


희지의 옆에 다가가 앉는 윤선.


윤선 미안해요.

희지 정말 괜찮은데 자꾸 미안하다고 하시면... 그게 더 미안한 일인 거 아시죠?

윤선 아... 미안... 아니...


희지, 윤선을 보고 웃는다.

윤선도 희지를 보며 웃는다.


윤선 우리 딸 생각이 나서 괜한 말을 한 것 같아요. 딸이 얼마 전에 결혼을 했거든요.

희지 축하드려요.

윤선 고마워요. 딸이 아가씨랑 나이가 비슷해요. 20대 초반? 중반이죠?

희지 스물 셋이에요.

윤선 우리 딸보다는 두 살 어리네요.

희지 결혼을 일찍 하셨네요.

윤선 그러게 말이에요. 가끔은 도망치려고 빨리한 건가 싶기도 해요.

희지 네?

윤선 제가 딸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희지 ......

윤선 그래서인지 시집가고 연락이 뜸해요. 자기 딴엔 걱정 안 끼치고 혼자 잘 해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서운한 거 있죠. 꼭 이젠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마음이 쓸쓸한 게...

희지 그건 아니에요. 쓸모없는 사람이라뇨...

윤선 기분이 그래요. 그냥... 기분이...

희지 큰 산을 넘으셔서 그래요.


윤선, 희지를 바라본다.


희지 원래 인생에 있어서 큰 산을 넘게 되면 기쁘다가도 허탈해진대요. 이젠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아주머니께선 딸을 위해 살아오셔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따님이 독립해서 나가니까 해야 할 일이 상실된 것처럼 느끼시는 거죠.

윤선 상실...

희지 고양이 키우시죠?

윤선 그걸 어떻게...


희지, 윤선의 외투에서 고양이털을 떼어 준다.


희지 이 친구는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아주머니를 보면서 행복해하고 또 즐거워하면서 살고 있을 거예요.

윤선 고양이가 그르릉 그르릉 이런 소리를 낼 때가 있어요.

희지 행복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사랑스럽죠. 고양이는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희지와 윤선, 말없이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본다.


윤선 고마워요.


윤선에게 미소 짓는 희지.

남은 세탁시간을 확인하러 세탁기에 갔다가

미처 세탁기에 넣지 못한 양말 한 짝을 빨래 가방에서 발견한다.


희지 (양말을 들고) 아...

윤선 아직 세탁 단계일 수도 있으니까 봐봐요.

희지 헹굼으로 넘어갔어요... 이걸 왜 못 봤지.

윤선 그럼 주세요. 나는 아직 세탁 단계니까.

희지 네?

윤선 멈추는 건 돈 안 들잖아요. 괜찮아요.


윤선, 희지 손에 든 양말을 가져가서 자신의 세탁물이 든 세탁기에 넣는다.


희지 감사해요.

윤선 나중에 다시 하려면 귀찮잖아요. 특히나 양말은 짝이 있는 건데.


세탁소 근처에서 작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희지 (소리를 듣고) 어?

윤선 들었죠?

희지 네. 아기 고양이 같아요.

윤선 잠시만요.


윤선, 세탁소 밖으로 나간다.

희지, 밖을 내다봤다가 자리에 앉아 세탁기 안에 돌아가는 세탁물을 가만히 본다.

잠시 후, 세탁소에 들어오는 윤선.


윤선 다행히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아요.

희지 어미는 있었어요?

윤선 네. 어미 있는 쪽으로 달려갔어요.

희지 (웃으며) 귀엽네요.

윤선 맞아요. 근데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어요. 누가 괴롭힌 건 아닌지 조금 걱정 되는데...

희지 요즘 하도 이상한 사람들이 많잖아요. 괜히 고양이한테 화풀이하는 사람들이요.

윤선 쓰레기 봉지 터진 걸 고양이 탓하고 독약 먹이는 일도 비일비재해요.

희지 본인이 못난 걸 모르고 고양이한테 왜...

윤선 그러게요.


그때, 세탁소에 주인 들어온다.

희지와 윤선을 슬쩍 훑어보다가 고장 난 세탁기를 만진다.


주인 어이고. 잘 좀 쓸 것이지. 이걸 또 언제 불러서 고쳐.


희지와 윤선, 마주봤다가 주인을 본다.


주인 (희지에게) 학생. 이거 세탁기 좀 볼 줄 알아?

희지 저요?

주인 여기 학생이 학생 말고 더 있어?

희지 저 학생 아닌데요.

주인 학생이 아니야? 아무튼 좀 와 봐.


희지, 조금 불쾌한 듯 일어나서 주인에게 간다.


희지 무슨 일이신데요?

주인 아니, 이게 사실은 고장이 아니고 털 뭉치 같은 게 끼어서 그런 거거든. 내가 매번 청소를 할 순 없잖어. 맨날 여기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희지 그래서 그냥 고장 표시를 해두신다고요?

주인 이거 청소하는 법 알아? 나는 자러가야 돼서 학생이 할 줄 알면 좀 해주고 가면 어떨까 하는데. 어차피 세탁 시간도 남았으니깐.

희지 전 몰라요. 그리고 그걸 왜 제가...

주인 (희지의 말 끊고)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 요즘 젊은 것들은 해보지도 않고 모른다고 하네.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희지 (어이없는) 뭐라고요?

윤선 (화가 난) 아저씨.

주인 (화를 내며) 됐어. A/S 부를 거니까 상관 말어.


주인, 궁시렁 거리면서 세탁소를 나간다.


희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윤선과 희지, 화가 난 얼굴로 세탁소 문을 바라본다.


#3


세탁기 두 대에 고장 표시가 되어 있다.

고장 나지 않은 한 대의 세탁기가 작동 중이다.

윤선, 고양이 가방과 함께 의자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다.


윤선 (전화하며) 반찬은 다 먹었고? 다 먹었으면 엄마가 더 챙겨주려고 그러지. 그저께 겉절이 담갔는데 갖다 줄까? (짧은 사이) 좀 쉬엄쉬엄 해. 그러다가 병 나. 이제 엄마가 바로 챙겨주지도 못 하는데... (짧은 사이) 알았어. 걱정 안 해. 아빠? 아빠도 괜찮아. 요즘 고양이랑 잘 지내고 있지.


윤선, 핸드폰으로 시계를 보더니 유연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탁기 뚜껑을 열고 유연제를 넣는다.


윤선 (전화하며) 이사 가기 전까진 입양 보내야지. 아직 좋은 주인이 안 나타나네. 다른 애기들은 다 찾아서 떠났는데.


세탁소에 희지가 빨래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희지, 윤선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윤선, 희지에게 미소 지으며 인사한다.


윤선 (전화하며) 아쉽다니. 좋은 일인데 뭐가 아쉬워. 길에만 있었으면 계속 아팠을 거 아니야. 주인 만나서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아.

희지, 세탁기를 찾지만 고장 표시가 없는 세탁기는 이미 윤선이 쓰고 있다.


윤선 (희지에게) 미안해요. 금방 끝날 거예요.

희지 (조용히) 아녜요. 할 일 하면서 기다리면 돼요.

윤선 (희지에게) 고마워요.


희지, 의자에 앉아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 열심히 적기 시작한다.


윤선 (전화하며) 치즈랑 잠깐 나와 있어. 응? 코인세탁소. 세탁기가 고장 났거든. 어차피 이사 갈 거니까 거기서 새 거 사면 되겠다 싶어서. (짧은 사이) 신세대는 무슨. 엄마 그렇게 안 늙었거든? 됐다. 얼른 들어가. 신랑이랑 맥주 한 잔 한다며. 그래.


윤선, 전화를 끊고 희지에게 다가간다.


윤선 미안해요. 세탁기가 저렇게 두 대나 고장 나 있을 줄은 몰랐어요.

희지 아녜요. 저게 아주머니 잘못인가요? 주인아저씨가 게을러서 그렇지.

윤선 그래도...


희지, 열중해서 글을 쓴다.

윤선, 그런 희지를 물끄러미 본다.


윤선 뭐 쓰는지 물어봐도 돼요?

희지 소설이에요.

윤선 오, 작가예요?

희지 지망생이에요. 이제 신춘문예 공모 기간이라...

윤선 고생 많겠어요...

희지 ...괜찮아요.

윤선 창작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요. 다 자기를 갉아서 하는 걸 텐데.

희지 이번엔 꼭 돼야 해요. 저번에 최종심에서 떨어졌었거든요.

윤선 부담이 되는 순간 일이 돼요.

희지 네?

윤선 창작하는 게 일이 되어 버리면 방법이 없어요. (짧은 사이) 딸이 미술을 했는데 정말 잘했어요. 그래서 항상 힘들다고 해도 넌 잘하니까 다음엔 잘 되겠지. 괜찮아. 그러고 말았죠.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닐 텐데. 그땐 딸한테 이렇게 말을 못해줬어요. (다정하게) 힘들었지? 정말 고생 많았다. 여기까지 그려내는데 얼마나 노력했을까. 수고 많았어. (쓸쓸하게) 그러다보니 언젠가부터 그림 때문에 힘들거나 속상한 얘길 안 하더라고요.

희지 ......

윤선 부담을 주고 일이 되게 한 건 주변 사람이었어요. 그것도 바로 가장 가까운 가족이.

희지 응원도 두렵고 그 반대여도 두려웠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윤선 그걸 몰라서 그래요. 마음은 같은데 표현 방법이 잘못된 걸 모르는 거죠.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는 음악이 흐른다.

자리에서 일어나 세탁물을 꺼내 건조기에 집어넣는 윤선.


윤선 건조기에 먼저 돌리고 빨래하니까 확실히 털이 줄어들은 것 같아요.

희지 정말요?

윤선 (웃으며) 고마워요. 얼른 빨래 들고 오세요.


희지, 세탁물을 들고 와서 세탁기에 넣는다.

윤선, 건조기에 동전을 넣고 작동시킨다.


소리 건조를 시작합니다.

희지 유연제 향이 너무 좋아요.

윤선 그쵸?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희지 저는 빨래 널 때가 가장 좋아요. 유연제 향 때문에요. 웃기죠?

윤선 저도 그래요. 그래서 빨래 갤 때 향기가 많이 줄어들어 있으면 마음이 아파요.

희지 오! 저도요!


희지와 윤선, 마주보고 웃는다.

희지, 세탁기에 동전을 넣고 작동 시킨다.


소리 세탁을 시작합니다.


그때, 고양이 가방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


희지 어? 고양이 소리 나요.

윤선 깼나보네.


윤선, 고양이 가방을 들고 와서 희지에게 보여준다.


희지 와, 대박 너무 귀여워요. 이름이 뭐예요?

윤선 치즈예요. 곧 다른 이름이 되겠지만요.

희지 네? 왜요?

윤선 임시 보호 중이거든요. 길 고양이었는데 어미 잃고 혼자 있길래 집에 데려왔어요. 주인이 생기면 아마 이름이 바뀌겠죠.

희지 아쉽지 않으세요?

윤선 뭐가요?

희지 예쁘게 키우고 계시다가 결국 새 주인에게 넘기셔야 하는 게...

윤선 관계라는 게 아쉬워도 어쩔 수 없죠. 그래도 길에서 고생하면서 컸을 아이가 행복하게 지낸다고 생각하면 기분 좋아져요.

희지 (고양이를 보며) 사랑받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치즈한테.

윤선 고양이 좋아해요?

희지 네. 부모님 집에도 한 마리 있는데 보고 싶더라고요. 집에 혼자 있는 게 너무 외롭기도 하고...

윤선 치즈 데려가실래요?

희지 네?

윤선 아가씨라면 좋은 주인이 되어줄 것 같아서요.

희지 (좋지만 조심스럽게) 그래도... 돼요?

윤선 다음에 만나면 고양이 용품들 다 전해줄게요.

희지 다른 아이들도 필요하잖아요. 제가 알아서 준비할게요.

윤선 아녜요. 이제 임시 보호 그만할 거거든요.

희지 왜요?

윤선 이별을 반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처음엔 길 고양이들한테 밥을 주다가 시작한 건데... 그 아이들이 제 발소리만 들으면 반갑다고 그르릉 거리는 게 너무 예뻐서요. 나를 필요로 하던 딸아이가 생각나서 그렇게 임시 보호를 하게 되었는데... 막상 관계를 맺고 보니 이별이 더 쉽지 않아져요. 다 제 탓이에요. 이기적이죠?

희지 아뇨...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아주머니 잘못이 아니에요.


그때, 세탁소에 주인 들어온다.

희지와 윤선을 훑어보다가 고장 난 세탁기 쪽으로 간다.


주인 먼지랑 털 머리카락 같은 거는 다 알아서 떼고 와야지. 여기가 세탁소지 털 떼는 덴 줄 아나. 뭔 놈의 것들이 다 뭉쳐가지고.

희지 (작게) 어휴, 또 왔네.


윤선의 손에 들려 있던 고양이 가방에서 고양이 울음소리 들린다.


주인 뭐야?


주인, 윤선 쪽으로 가서 고양이 가방을 가리킨다.


주인 고양이?

윤선 그런데요?

주인 고양이 몇 마리나 키워요?

윤선 무슨 일이시죠?

주인 이제야 알았네. 당신이 범인이었구만? 당신 때문에 우리 세탁소 세탁기들이 다 먼지에 털에 난리도 아니에요.


희지, 화가 나 주인에게 다가간다.


희지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세탁소 매번 고장 나는 걸로 유명한데. 왜 이 아주머니한테 그러세요?

주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희지에게 삿대질하며) 학생이 다 책임질 거야?

희지 학생 아니라니까요?

주인 (희지에게 삿대질하며) 그럼 니가 다 책임질 거야?

희지 니? 지금 니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왜 자꾸 반말에 삿대질이세요?


윤선, 고양이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은 뒤 희지를 잡고 말린다.


윤선 괜찮아요.

희지 괜찮긴 뭐가 괜찮으세요? 지금 아저씨가 자꾸 아주머니 탓하는데.


고양이가 계속 울기 시작한다.


주인 여기 A/S 값 안 물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희지 아니, 아저씨...

윤선 (희지의 말을 막고) 아저씨, 저는 어차피 이사 갈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씨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주인 그래. 잘 됐네. 세탁기 고장 날 일 없고. 내가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한 대 고장 나면 얼마나 손해인 줄 알아?

희지 (화가 나서) 저번엔 고장 난 게 아니라 청소하기 귀찮아서 두는 거라면서요!

주인 뭐야??


고양이가 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윤선 그만하세요.

주인 그놈의 고양이 길거리에서 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아직도 있네.


주인, 씩씩 대며 세탁소를 나간다.

희지, 화가 안 풀린 듯 문 쪽 허공에 발길질을 한다.

윤선, 고양이 가방 안에 손을 넣어서 고양이를 쓰다듬는다.


희지 저 아저씨 고양이 학대범 아니에요? 의심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거 다 인터넷에 올려서 여기 망하게 해야 돼요.

윤선 난 어차피 다른 곳으로 갈 거라 괜찮아요. 이 동네에 코인 세탁소 여기뿐인데 사라지면 다른 사람들 골치 아파질 거예요.

희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화가 나잖아요. 왜 끝까지 아주머니 탓을 해요.

윤선 성숙하지 못해서 그래요. 겉은 늙어가지만 속은 아직 아이인 거예요.

희지 (고양이 가방을 보며) 치즈는 좀 괜찮아요?

윤선 큰 소리가 들리니까 좀 놀란 것 같아요.

희지 치즈한테 미안하네요...

윤선 곧 만나요. 금요일 밤에 또 올 거죠?

희지 네. 그때 올게요.


#4


윤선, 혼자 세탁소에 앉아 있다.

세탁기 두 대에는 여전히 고장 표시가 되어 있다.

윤선의 옆엔 작은 가방 하나와 고양이 가방, 용품이 들어 있는 큰 가방이 놓여 있다.

물끄러미 앉아 있다가 큰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하는 윤선.


그때, 세탁소에 희지 들어온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윤선 왔어요? 빨래는요?

희지 오늘은 그냥 왔어요. (짧은 사이) 아주머니랑 치즈 보러.


고양이 울음소리 들린다.

희지, 고양이 가방으로 다가간다.


희지 치즈야, 잘 있었어?


희지, 웃으며 의자에 앉는다.

윤선,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큰 가방을 희지 쪽에 둔다.


윤선 고양이 화장실이랑 모래, 습식 사료, 건식 사료, 간식, 장난감 이런 것들 다 넣어 놨어요. 치즈는 연어 들어간 거 먹으면 설사하니까 주시면 안 돼요. 그것 말고는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요. 특히 고양이 치즈를 좋아해요.

희지 감사해요. 이렇게 다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윤선 잘 키워주세요. 그거면 돼요.


고양이 울음소리 들린다.


희지 이사는 언제가세요?

윤선 일요일에요. 지금도 짐 싸다가 나왔어요.


윤선, 작게 웃는다.

희지, 말없이 윤선을 바라보다가 바닥을 본다.

희지 어디로 가세요?

윤선 대전이요. 어머니가 그 근처에 사시거든요. 몸이 좀 안 좋으셔서 같이 지내려고 해요.

희지 꿈같네요.

윤선 뭐가요?

희지 아주머니랑 같이 빨래되는 동안 이야기 나눴던 순간들이요. (짧은 사이) 이제 고양이를 돌보거나 밥 주는 일은 안 하시나요?


윤선, 작은 가방에서 건식 사료를 꺼낸다.


윤선 부끄럽지만... 오늘도 주면서 왔어요.

희지 정말요? 근데 왜 부끄러우세요?

윤선 (미소 지으며) 말을 바꿨잖아요. 이별하는 게 싫어서 다시는 관계 맺지 않는다 해놓고.

희지 (미소 지으며)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윤선 아가씨랑 대화하면서 많이 깨달았어요.

희지 네?

윤선 내가 아직 덜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 탓을 하든, 내 탓을 하든 결국 어딘가에서 원인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희지 원래 사람은 불완전하대요.

윤선 그래서 대화가 필요한가 봐요.


윤선, 이민 가방에서 유연제를 꺼낸다.


윤선 저번에 향 좋다고 한 게 생각나서 넣었어요.

희지 감사해요...

윤선 마지막 헹굼 때, 알죠?


희지, 물끄러미 윤선을 바라본다.

그런 희지를 보고 웃는 윤선.

희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종이를 뜯은 뒤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서 윤선에게 준다.


희지 연락주세요. 알아보니까 임시 보호하셨던 분들한테 새 주인이 사진도 주기적으로 보내고 한다더라고요. 제가 치즈 사진도 보낼 겸 연락할게요.


윤선, 종이를 바라보다가

소중한 것인 듯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윤선 고마워요.

희지 저도 감사해요.

윤선, 작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희지, 윤선을 따라 일어난다.


윤선 가봐야겠어요.

희지 조심히 가세요.


윤선, 세탁소를 나간다.

희지, 세탁소 문 쪽을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는다.

윤선이 주고 간 유연제의 뚜껑을 열어 향을 맡는다.


#5


아무도 없는 세탁소.

동전교환기에 고장 표시 되어 있다.

희지, 고양이 가방과 빨래 가방을 들고 세탁소로 들어온다.


희지 치즈야. 여기 기억나? 여기서 나랑 너랑 처음 만났잖아.


고양이 울음소리 들린다.


희지 그때 그냥 핸드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할 걸 그랬어... 왜 바보 같이 내 번호만 줬는지 몰라. 다 내가 멍청해서... (짧은 사이)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누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세탁기에 세탁물을 다 넣고 뚜껑을 닫는 희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꺼내려 하는데 동전이 없다.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5000원짜리 지폐가 나온다.


희지 아, 또...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 희지.


희지 집 갔다 오면 너무 늦는데...


그때, 희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받지 않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희지.

세탁기의 뚜껑을 열고 무언가 망설인다.

소리 동전을 넣어주세요.

희지 ......

소리 동전을 넣어주세요.


희지, 세탁기의 뚜껑을 닫는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희지 (전화하며) 엄마... 그냥 바빠서. 글 쓰느라 시간이 없었어. 저번에처럼 또 마지막에 떨어질까봐 정말 열심히 했거든. 나 만약에 이번에 또 떨어져도...


희지, 엄마의 말을 듣고 눈물이 고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정말 행복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희지 (신이 나서) 엄마, 나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어. 망고는 잘 지내? 얘는 이름이 치즈인데....


희지,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간간이 고양이 울음소리 들린다.


그 사이 조명 서서히 암전 된다.

무대

를 감싸는 음악, 점점 커지며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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