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코로나의 선물, 사회적 거리 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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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철 신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얼마 전 정세균 국무총리는 코로나 방역을 위해 2주 동안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전 국민의 동참을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21세기 최첨단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최고의 코로나 대처법이라니 참으로 안타깝다.

대부분의 인간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활동 영역의 확장을 꾀한다. 그래서 문화 활동, 동아리 활동, 계모임, SNS 하기, 직장생활 등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양질의 관계 형성이 인간 생존의 질과 양을 늘려준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자기를 해치거나 상실할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불필요한 대인 접촉을 줄이라는 방책은 감염병이 돌 때마다 가끔 제기되어 왔었다. 지난번 ‘사스’ 때도 그랬고 ‘신종플루’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번에 꺼내든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물리적 거리두기’일 것이다.

애초에 영어로 ‘social distancing’이라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마땅하나, 사회와 단절하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어서 시민들이 불편해하는 것 같다. 이참에 ‘물리적 거리두기’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본다. 정보통신이 발달한 오늘날은 휴대폰으로 물리적 거리를 둔 채 사회적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신흥 경제 강국으로 급부상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지나치게 ‘조직’, ‘국가’ ‘우리’를 강조한 측면이 있었다. 지나친 집단주의나 조직주의가 낳은 부정적인 단면이다. 사회참여의 긍정적 기능도 매우 많다. ‘시민의 사회참여’를 선진국을 가늠하는 척도로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의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을 통해 우리의 삶과 일상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주52 시간 근무’가 정착되어 저녁이 있는 삶이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지만, 우리 국민은 여전히 분주하고 바쁘다.

개인이 지나치게 관계나 주변에 몰두할 경우 개인의 실존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커진다. 개인이 조직이나 집단에 몰두하도록 압박하는 문화나 제도 역시 개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라지면 너도 없게 된다. 나도 사라지고 너도 사라진 관계라면, 그 사회나 조직은 제대로 기능하기가 어렵다. 암벽 등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바위에 찰싹 달라붙을 때라고 한다. 암벽과 지나치게 밀착하면 나와 주변을 살피고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져 추락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모임이나 대인관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신분석은 공생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공생이란 자기와 대상(타자)의 경계를 상실한 상태이며, 정체성에 문제를 지닌 경계성 성격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알려져 있다. ‘적절한 거리두기’도 어찌 보면 나와 주변 간의 경계가 모호한 공생적 관계를 지양하고 자기와 타자를 구분하며, 자기중심적 삶의 비중을 늘리라는 요구로 볼 수도 있다. 현대인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주변과의 적절한 물리적, 관계적 거리를 유지한다면 유한하고 유일무이한 자기 자신에게 더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더 많이 만나서 대화하려면 자기와 관계하는 시간부터 늘려가야 한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되면, 이전의 것들이 시들해지고 안 보이던 것들이 선명해질 수도 있다. 이전과 다른 가치 체계로써 여생을 의미 있게 채울 수도 있다. 저녁이 있는 삶, 가족과 더 많이 어울리는 삶을 보너스로 가질 수도 있다. 지나친 물리적 관계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자신에게 더 몰두할 경우 타인의 소중함을 더 쉽게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존중은 자기 존중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코로나19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인류에게 실로 역대급의 혼란을 안기고 있다. 그런데도 이번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적절한 ’관계적 거리두기’가 정착한다면 ‘자기 몰두’와 ‘자기 사색’의 선물도 함께 주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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