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한국어 세계화의 명과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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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얼마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콘서트를 여는 방탄소년단(BTS)을 위해 라스베이거스 관광청이 도시 주요 건물에 BTS를 상징하는 보라색 조명을 밝히고 환영했다는 것이다. K팝뿐만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 4관왕을 달성했으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 인기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한류라 불리는 K콘텐츠의 인기는 이제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유행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자, 세계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은 한국어 학습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의 경우 1997년 1회 시험 응시자가 2692명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응시자는 32만 8303명으로 늘었다. 또한 한국어를 제1 또는 제2외국어로 채택한 국가는 16개국이나 되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해외 초·중등학교는 44개국 1820개교, 학생은 17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류로 한국어 보급 세종학당 급증
교육 수준·학생 관리 부작용도 발생
양적 성장 맞춰 질적 도약 다져야

한국어 학습자의 증가는 국가 브랜드 가치와 국제적 위상 제고,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확대, 한국 기업의 상품 소비로까지 이어지는 유무형의 경제 효과가 매우 크다. 이에 정부에서는 한국어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정부의 한국어 세계화 대표 사업으로는 세종학당 사업이 꼽힌다. 전 세계에 한국어를 보급하는 세종학당은 2007년 3개국 13개소에서 출발해 지난해엔 82개국 234개소로 늘어났는데, 앞으로 270개소까지 확대한다고 한다. 해외에 한국어를 보급하는 사업뿐만 아니라 외국인 유학생의 국내 유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에 따르면 2023년까지 외국인 유학생 20만 명을 유치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한국어 학습 수요에 맞춰 한국어 세계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어 열풍에 도취해 양적 성장에만 몰두하고 질적 성장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교육의 질이 담보되지 않은 채 무조건 학생을 유치하고 교육기관을 확대하는 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기관 확대를 살펴보자. 한정된 재원 안에서 세종학당 몇 개국, 몇 군데 설립이라는 양적 지표를 통해 한국어 세계화라는 목표를 이루려고 하다 보니 한 곳에 지원되는 운영 비용이 아주 적다. 세종학당 한 곳의 평균 지원 비용은 중국어의 해외 보급을 담당하는 ‘공자학원’의 13% 수준에 불과하다.

운영 비용의 부족은 결국 좋은 교육 시설을 갖추지 못하거나 우수한 한국어 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이는 결국 교육의 질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짧은 시간에 많은 세종학당을 개설함으로써 교육 운영에 대한 관리와 감독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다.

따라서 무리한 양적 확대보다는 거점 세종학당을 중심으로 충분한 지원을 하면서 한국의 선도적인 IT 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교육 시설을 갖추고, 우수한 교원을 확보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후 점진적으로 세종학당을 확대해 나갈 때 교육의 질을 담보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학생 유치도 다르지 않다. 한국어 어학연수생과 유학생 유치 확대에만 몰두하다 보니 유치 후 관리는 손을 놓고 있는 지경이다. 인천의 한 대학에서 발생한 160여 명의 어학연수생 잠적 사건이나 강원도의 한 대학 외국인 학생들이 일으킨 10대 소녀 성범죄 사건은 학생 유치 후 사후 관리가 안 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 준다.

또 외국인 유학생 확대라는 목표를 위해 한국어 실력이 부족한 어학연수생을 무분별하게 학위 과정에 진학시킴으로써 이들이 학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소외되는 문제도 심각하다. 나아가 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도 수업과 평가에서 상대적 피해를 보게 돼 유학생과 한국 학생들이 서로 혐오하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 유치 확대가 도리어 혐한 인식을 확대하고 국제화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는 형국이다.

방송에 나온 뒤 손님이 갑자기 몰린다고 무리하게 식당 테이블을 늘려 음식의 질이 떨어지게 되면 그 식당은 얼마 못 가 손님이 떨어지고 문을 닫는다. 한국어 세계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어 학습자가 많아진다고 무턱대고 교육기관을 확대하고, 무분별하게 학생을 유치한 뒤 관리와 감독을 소홀히 한다면 곧 교육의 질은 떨어지고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점차 줄 것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잠시 숨을 고르고 한국어 세계화 정책의 명과 암을 살펴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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