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바뀌어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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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사회부 차장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기는 글렀다. 내가 너를 걱정하면서 죽고 싶지는 않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부산지부 한 회원은 ‘삭발 결의문’에 이렇게 썼다. 그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너를 시설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나의 무책임한 모습을 반성한다”면서 “네가 혼자 살아갈 시간들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19일 그를 포함해 전국의 발달장애인 가족, 연대하는 시민 555명이 청와대 앞과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삭발을 했다. 장애인부모연대가 삭발과 이어진 단식 농성으로 요구한 것은 발달장애인의 24시간 지원체계다.

이것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2018년에도 삭발을 하고 천막농성을 했다. 21년째 계속되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투쟁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투쟁 방식을 두고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갑자기 비판을 쏟아낸 것이다. 유력 정치인의 집중 공격에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는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온라인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표현도 함께 급증했다.

전장연의 이번 투쟁은 실은 장애인 권리 예산 투쟁이었다. 여기에는 이동권 보장뿐 아니라 탈시설 자립지원 시범사업과 장애인활동지원 예산이 포함돼있다. 이준석 대표는 이를 두고 전장연이 이동권을 넘어 예산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비난하고 ‘탈시설’에 대한 장애인 간 ‘갈라치기’까지 시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이동하고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권리는, 비장애인에게 그렇듯, 분절될 수 없는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검토하겠다’는 약속 대신 실제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장애인의 투쟁 방식이 아니라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사회다. 장애를 여전히 결함이나 손상으로 보는 시선이다. 이미 세계보건기구는 장애를 개인 신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특징과 사회의 특징 간의 상호 작용에 따라 발생하는 기능, 활동, 참여의 제약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대한 지 오래다. 이렇게 적용할 때 미국의 장애인 비율은 전체 인구의 20%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5.1%다.

“제 아이의 장애는 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부산지부장의 ‘삭발 결의문’은 이 말을 풀어 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의 발로 흙을 밟아보지 못한 아이의 장애가 아니라 제 발로 걷지 못하면 넘을 수 없는 턱, 장애인에 대한 편견, 장애인이 나고 자란 곳에서 편안하고 익숙한 이웃으로 살 수 없는 환경이라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이러한 장애 개념의 변화를 잘 아는 것 같다. 장애인의 날에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그렇다. “장애는 인간의 한계가 아니고 따라서 극복의 대상도 아니다”라면서 “장애는 더 이상 불가능과 불평등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곧 취임을 앞둔 그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정책과 예산으로 지키기를 기대한다. 장애인의 출근길 지하철 타기가 투쟁이 되지 않는 날을, 발달장애인의 부모가 더 이상 아이를 걱정하면서 죽지 않아도 되는 날을 기다린다. i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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