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56. ‘나더러’ 그러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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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만약 날더러 그러한 자유와 지금 내가 놓여 있는 부자유를 송두리째 바꿔 줄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어떻게 할까.’

이병주의 소설 <소설·알렉산드리아>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래는 신경림의 시 ‘목계 장터’ 가운데 한 구절.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정희성의 시 ‘저 산이 날더러’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산이 날더러는/흙이나 파먹으라 한다/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쑥굴헝에 박혀/쑥이 되라 한다/…’

한데, 여기서 공통으로 나오는 말 ‘날더러’는 잘못이다. 왜 그런지는 ‘날더러’에서 ‘날’을 분석하면 알 수 있다. 이 ‘날’은 ‘나를’이 줄어든 말.(‘더러’는 사람을 나타내는 체언 뒤에 붙어서 어떤 행동이 미치는 대상을 나타내는 격 조사. 조사 ‘에게’와 비슷하다.) 그러니 ‘날더러’는 ‘나를더러, 나를에게’라는 이상한 말이 되는 것. ‘우리더러, 누구더러, 엄마더러’를 ‘우릴더러, 누굴더러, 엄말더러’로 쓰지는 않으면서 유독 ‘나더러’만 ‘날더러’로 잘못 쓰는 건, 따지고 보면 좀 희한한 일인데, 어쨌거나 ‘나더러’가 옳다. 쓸데없이 이렇게 ‘ㄹ받침’을 덧붙이는 행태로는 이런 것도 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중년객은 봇짐을 끌르더니 한 움큼의 보물을 꺼내 총각에게 주면서 팔아 쓰자 하였다.’

‘특히, 경유지에서는 상당히 빡세게 검사를 하는 편인데 와이어자물쇠 해둔 친구 백팩을 독일 공항 직원이 그냥 끌르더니 이거저거 엄청 뒤져봤었다.’

인터넷에서 본 글들인데, 바로 ‘끌르더니’가 문제인 것.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에 ‘끌르다’가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말은 없다는 얘기. 옳은 말은 ‘끄르다’다. 표준사전을 보자.

*끄르다: ①맺은 것이나 맨 것을 풀다.(보따리를 끄르다./짐을 끄르다./결박을 끄르다./노승은 이렇게 말을 하더니 등 뒤에 졌던 바랑을 끄릅니다.<김유정, 두포전>/고지를 내려와 군화 끈도 끄를 새 없이 그는 다시 신병들을 이끌고 같은 고지로 올라가야 한다.<홍성원, 육이오>) ②잠긴 것이나 채워져 있는 것을 열다.(단추를 끄르다./자물쇠를 끄르다.)

이러니 ‘봇짐을 끌르더니/백팩을 끌르더니’는 ‘봇짐을 끄르더니/백팩을 끄르더니’로 써야 했다. 결국 저 ‘ㄹ받침’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추가된 것이었다. ‘끌러, 끌렀더니, 끌러서’로 활용되는 걸 보고 착각을 해서 저렇게들 쓰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끄르면, 끄르니, 끄를지라도’와 마찬가지로 ‘끄르더니’라야 옳았던 것.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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